그리움
밤 산책을 나섰다. 저녁 여덟 시가 넘은 사위가 온통 깜깜한 시각. 그러나 도시의 밤은 깜깜하지 않다. 여기저기 밝히고 있는 가로등 불빛 때문이다. 가로등 아래서 책을 읽어도 될 정도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면서 걸었다. 아파트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천변 산책로로 들어섰다. 개울물은 돌돌돌 흐르다 졸졸거리고 또 고요하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켜져 있어 어둡지 않지만 환하지도 않은 천변 산책로. 내가 좋아하는 길이다.
늦은 시각이어서 산책자가 적었다. 심심치 않게 몇이 지나다 휑하다 또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가끔 유난히 어둑한 길을 지날 때면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크고 요란하게. 밝은 곳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는데, 어둑한 곳에서는 잘 들린다. 아니, 어두침침해야 풀벌레가 기척을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풀무치, 여치, 찌르레기. 정겹고 귀에 익은 저 풀벌레 소리. 한참 서서 들었다. 내 발자국이 멈추자 더 힘차게 울어댄다. 내 마음을 아는 듯.
서 있으니 보인다. 노랗게 핀 달맞이꽃, 얼마 남지 않은 금계국, 원추리꽃, 달개비꽃. 수크령은 기세 좋게 꽃대를 곧추 세우고 있다. 저만큼엔 갈대도. 꽃 다 져버린 창포 잎이 무성하고, 창포 군락지에 물오리 세 마리가 모여 도란거리고 있다. 물오리들도 나처럼 산책 나온 걸까. 아니면 못 나눈 이야기들이 남아 저렇게 나누고 있는 걸까. 그들 옆에 앉아 나도 함께 도란거리고 싶었다.
풀벌레 소리가 높아졌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우리 집 울타리에서 밤새 들리던 풀벌레 소리다. 높낮이도 똑같다. 풀벌레 소리 요란하던 밤에 만났던 ‘현’이 떠올랐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객지에서 이방인처럼 살다 추석을 쇠러 온 나와 현이 우연히 만난 것은 앞 개울둑에서였다. 현은 건너 마을에 사는 친척집에 놀러 온 터였다. 그와 나는 같은 학교 친구가 아니었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고, 언젠가는 친척집 동생을 통해 내게 연애편지 비슷한 것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가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때도 유난히 풀벌레가 울었다. 우리는 개울둑에 앉았다. 막 떠오른 보름을 향해 가는 달이 하늘에 하얗게 떠 있고, 개울물은 돌돌돌 흘렀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현은 고등학생이었고 나는 진학을 못한 채 객지로 떠돌 때였다. 얼굴이 뽀얗고 귀공자 티가 역력한 현이 나의 근황을 물었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열등감을 느꼈다. 나는 왜 그가 이끄는 대로 그 개울둑에 앉았던 걸까. 후회가 일었다. 그가 말했다. “인생이 다 끝난 건 아니잖아. 똑똑한 너니까 잘 헤쳐 나갈 거라 믿어.” 나는 아무런 말을 못 했다. 풀벌레 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더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응원 비슷한 것을 했던 것 같고, 나는 그가 내게 보냈던 연애편지 내용을 떠올리기도 했던 것 같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것은 사귀고 싶다는 문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해야 되었는데 꺼내기 힘들었다. 결국 서로 그 부분을 확인하거나 분명히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가 우리 마을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는 다시 개울을 건너서 갔으리라. 그 후 그를 또 만난 적 없다.
몇 년 전, 현의 친척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현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의 안부를 물었다고. 너무 뜬금없다며 크게 웃었다. “언니, 그 오빠가 언니 좋아한 것 아니에요? 예전에 내가 편지 배달 한 번 한 것 같은데.” 깔깔대는 그녀에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난 모르겠는데. 그냥 불쑥 생각나서 물어본 거겠지. 그 친구는 잘 살지?” 시치미를 뗐다. 그러고 싶었다. 그러면서 무심한 듯 나도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도 환청처럼 기억 속의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듯했다.
풀벌레 소리가 더 커졌다. 밤이 깊어가나 보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달맞이꽃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현과 내가 앉았던 개울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 저 풀벌레 소리를 어쩌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그날의 추억을 안고 흐르는 개울물과 풀벌레 소리. 추억은 슬픈 것도 아름답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지난날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건 과거의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지 않는가. 그렇다면 난 건강한 사람이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기억 속에서. 아름다운 여름밤이 깊어간다. 이제 가을이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