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향 솔솔, 추억 솔솔

그리움

by 최명숙

오십여 년 전쯤 이맘때, 나는 동네 뒷동산에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몇몇 친구들과. 이미 하굣길에 약속이 돼 있었다. 책보 놓고 대나무 소쿠리 챙겨 뒷동산에서 만나기로. 입가심을 하느라, 급한 심부름 하느라, 조금 늦는 것쯤이야 아무 상관없다. 소쿠리 들고 부랴부랴 뒷산에 오르면 친구들이 모여 있을 테니까. 숙제도 없다. 추석 며칠 전쯤부터 숙제를 내주는 선생님들은 없었으니. 그거야, 명절 준비 도우라는 암묵적 지시였다.


뒷동산 소나무 아래 우리들은 모여 솔잎을 뽑았다. 쏙, 쏙, 쏙. 그해 봄 연둣빛 새잎이 나 이젠 제법 진녹색 솔잎이 된 잎을. 묵은 솔잎과 별반 구분이 안 될 것 같아도, 우리는 금세 안다. 그건 산촌에서 자란 소녀들에겐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누워서 떡 먹기가 쉽지 않다는 걸, 어른이 돼서 알고 그런 속담이 왜 생겼을까, 의아한 적 있지만. 아무튼 새 솔잎을 뽑아 소쿠리에 담았다.


멀리 보이는 찻길로 버스가 한 대 지나가고 트럭이 한 대 지나갈 때도 있었다. 드문드문 다니던 버스가 자주 눈에 띄었던 것은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는 의미리라. 한 소녀가 동요를 부르기 시작하면 금세 같이 불렀고, 까르르르 웃으며 솔잎을 뽑았다. 식구가 많아 송편을 많이 하는 집은 한 사흘 뽑아야 했다. 우리 집처럼 떡을 많이 하지 않는 집은 하루 이틀이면 되었다.


그렇게 솔잎을 뽑아 들고 산에서 내려올 때, 무수히 떨어진 도토리를 줍기도 했다. 참다람쥐가 우리를 보고 상수리나무 뒤로 숨고, 잠자리와 호랑나비가 구절초와 쑥부쟁꽃에 앉았다 휘리릭 날아가기도 했다. 우리들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뒷산은 철마다 변화가 있었다. 진달래꽃이 지고 나면, 때죽나무꽃과 팥배나무꽃이 산벚꽃과 함께 피어났다. 꽃이 다진 여름엔 무성해진 상수리나무와 오리나무를 담쟁이넝쿨이 친친 감고 올라갔고, 초가을 이맘땐 담쟁이 잎과 붉나무 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솔잎이 가득 든 소쿠리를 마루에 내려놓았다. 할머니는 내가 뽑아온 솔잎을 보며 함함한 미소를 띠었다. 자라고 있는 나를 재보는 것이리라. 한 움큼 들어 있는 도토리를 꺼내 따로 둥구미에 담았다. 그렇게 모은 것과 할머니가 가끔 뒷산에 올라가 주운 도토리로, 늦가을 어느 날 쯤엔 도토리묵을 만들었다. 쌉싸래하며 쫀득쫀득한 도토리묵 맛은 기억에 여전한데, 지금은 그와 같은 묵을 먹어볼 수 없다.


어머니는 솔잎을 깨끗이 씻어 뒤란 그늘에 널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내일 조금만 더 뽑아야겠다, 둘 중 한 마디 하면 그대로 했다. 때론 이만하면 되었다 해도, 친구들 따라 뒷산에 올라가 솔잎이 많이 필요한 친구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저 재미였다. 놀이 같은. 조금 더 필요하면, 동생과 같이 갈 때도 있었다. 동생은 솔잎을 뽑지 않고 소쿠리를 들고 있거나 아무 솔잎이나 따서 담곤 했다. 그러다 내게 지청구를 들었다. 그래도 같이 있는 게 좋은지 삐쳐서 집으로 가진 않았다.


추석 전날, 바로 오늘 같은 날. 어머니는 그늘에 널어 물기 말린 솔잎을 소쿠리에 담아 마루 한쪽에 놓고, 불린 쌀을 절구에 찧어 만든 쌀가루를 양푼에 담아 내놓았다. 송편에 넣은 소를 골고루 준비해 내오고, 쌀가루를 익반죽해 베보자기로 덮어 놓으면, 송편 만들 준비 끝이다. 할머니와 나는 송편을 만들고 어머니는 차례음식을 만들었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어야 예쁜 딸을 낳는단다. 할머니는 늘 그 말씀을 하셨다.


어제는 떡 선물이 두 군데서 들어왔다. 옛날 우리가 만들었던 송편처럼 크지 않고 앙증맞게 작으며 예뻤다. 손으로 직접 빚었다면 그 떡을 만든 사람의 딸은 분명히 예쁘리라. 하지만 요즘엔 모두 기계로 만드니. 속에 든 소는 갖가지였다. 동부고물, 녹두고물, 깨고물, 콩이 든 것. 색깔도 다양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더니, 맛도 있었다. 그중 한 곳에서 온 떡엔 솔잎이 얹혀 있었다. 먹을 때 솔 향이 솔솔 났다. 추억도 솔솔 피어났다.


그 옛날, 오늘 같은 추석 전날. 할머니와 나는 마루에 앉아 송편을 빚고, 동생들은 시시덕거리며 마당과 마루를 오르내리며 저지레를 했으리라. 가끔 할머니 꾸중을 들으며. 어머니는 부엌에서 갖가지 전, 나물, 산적 등 음식을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 솔솔 풍기며 만드시고. 그립고 아련한 옛날의 추석 전날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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