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것부터 먼저 하기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기분 나쁠 정도로. 다른 부위도 그렇지만 머리가 아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머리를 들어도 아프고 숙여도 아프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잘 아프지 않는 편인데 이유를 알 수 없다. 아침부터 전전긍긍했다. 할 일은 태산인데, 집중할 수가 없다. 아침에 한 편씩 쓰던 짧은 에세이도 못 쓰고, 해야 할 일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도 그랬다. 증상은 똑같았고.
수면량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식사량이 부족해서일까. 두 가지 이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 원인이 있는 걸까. 도저히 문자 하나도 생성해 낼 수 없어, 에라 모르겠다, 먹기부터 하자 싶었다. 아침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옥수수 두 개를 쪄서 와구와구 먹었다. 미의 엄마가 보내준 복숭아도 하나 먹었다. 웬만해선 먹지 않는 진통제 두 알까지 삼켰다. 이제 자야겠다 싶어, 음악을 켜고 잠을 청했다. 월말까지 해내야 하는 일이 있는데, 그걸 미루고. 한 시간 자고 났다. 조금 나은 것 같지만 여전히 아프다.
아무래도 그 일 때문 같다. 해내야 하는 일을 앞에 두고 있는데, 또 그것의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머리가 아픈 것 아닐까 싶다. 흔히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머리 아프다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이렇게 맞을 줄 몰랐다. 그렇다면 그 일을 어서 해내야 아프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그리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또 오늘 써야 하는 글 한 편도 쓰지 못했으니, 두통은 더 가중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하기 쉬운 것부터 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일인데 왜 그걸 미루고 있는가 말이다.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다니, 어리석기만 한 나다. 글감을 무엇으로 할까. 두통 때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컴퓨터를 열고 한참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커서는 자꾸 나를 재촉한다. 빨리 써, 문자를 찍으라고, 어서어서!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처럼 느꼈다. 마음의 문제이리라.
쉬운 것부터 먼저 할 것. 그건 오늘 써야 하는 글 한 편이다. 글감은 ‘두통의 원인과 그것에서 벗어나기’다. 독자들에게는 별 하찮은 글감일지 모르나 내게는 아주 절박한 글감이다. 무엇보다 두통의 원인과 벗어나는 방법을 생각해 냈으니 글이 안 되진 않을 거다. 글감은 그렇다고 해도 주제는 무엇으로 할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써야 한다. 주제를 처음부터 정해놓고 쓰는 경우가 있지만 쓰다 보면 이것이다 할 때도 있다.
에세이니까 솔직하게 쓰면 된다. 소박한 문체로, 간결한 문장으로. 에세이는 흔히 심경의 나상이라고 하므로 감출 필요 없고, 멋진 문장으로 쓰려고 고심할 필요도 없다. 글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독자와 소통 안 되는 글을 쓰게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으니까. 쉽게 읽히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글이 좋다. 그러면서 의미가 있으면 된다. 여기서 의미는 주제이다. 주제가 나타나면 되는 것이다.
제목을 지었다. 두통의 원인과 그것에서 벗어나기. 글감으로 제목을 삼았다. 써놓고 보니 그럴듯하다. 제목도 처음에 정해놓고 쓰기보다 쓰다가 짓거나 다 써놓고 지을 때가 더 잦다. 또 지어놓고 몇 번이고 고치기도 한다. 제목이 중요하긴 하다. 첫인상과 같은 거니까. 글의 내용을 내포한 것이 좋다. 거기다 독자의 시선을 낚아챌 정도로 신선하면 더 좋다. 기발한 제목 짓기가 쉽지 않다. 지어 놓고 보면, 내용과 동떨어질 때 있고, 하도 많이 써서 진부할 경우도 있다. 그러니 어디 쉬운가. 글쓰기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쉬운 게 없다.
두통의 원인 두 가지 중 하나가 해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쓰다 보니 오늘 써야 하는 한 편의 글이 거의 완성되어 가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건 아주 지엽적인 것이다. 두통의 원인이 될 것도 없는 아주 작은 일이다. 중심이 되는 해야 할 일, 그것에 얹혀서 원인이 되어버린 것뿐이다. 이렇게 짧게 쓰는, 그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날 것 같은 글이 무슨 원인이 되겠는가. 조금 보탠다면 엉뚱한 것을 핑계 삼아 두통의 원인을 크게 만든 것이다. 비겁하게.
이쯤에서 두통의 원인 그 전말을 밝혀야겠다. ‘논문’이다. 석 달 전에 청탁받은. 학교 떠나면 다시는 논문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간혹 이렇게 청탁이 들어온다. 물론 선택이긴 하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하지만 거절한다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직장만 그만둔 것이지 공부를 그만둔 것은 아니잖은가.
그때는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언제나. 이번 달 말일까지가 기한이다. 엊그제 의뢰한 기관에서 확인 전화가 왔다. 기한까지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청탁받은 원고의 기한을 어겨본 적 없는 나다. 논문이고 작품이고 간에. 이제 보니 어제도 아니고 전화받은 엊그제부터 두통이 있었던 것 같다.
길게 기한을 가진다고 써지는 것은 아니다. 짧은 기간에 집중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지난달엔 아들이 들어오고 집안 정리 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고, 이달에 집중해서 쓰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사실 논문이 지연된 이유가 있었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이번 달 상순에는 더웠고, 중순부터 집중하려고 했는데 행사가 몇 있었고, 특강도 있었으며, 하순에는 회의와 모임이 갑작스레 생겨서 시간이 금세 가버렸다. 써놓고 보니 군색한 변명이다.
이제 두통의 원인이 정확해졌다. 벗어나는 방법은, 쓰면 된다. 아, 이 글을 쓰는 중에 두통은 벌써 거의 사라졌다. 오늘 과제는 끝났으니, 이제부터 두통의 중심 원인이 되었던 논문에 집중해야겠다. 이런 글감으로 글이 한 편 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래도 주제는 건졌다. ‘할 일을 미루지 말고 미리미리 하자’이다. 어떤가, 진부하지만. 두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이제부터 집중, 집중이다. 끝까지 나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