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 구름 속에 해가 빛나듯

일상

by 최명숙


한강은 고요히 흘렀다. 수심이 깊으면 더 고요하다. 내가 탄 광역버스는 한강 옆을 지났다. 한낮의 버스 안도 고요하다. 버스 안에 드문드문 앉은 사람들. 요즘엔 사람이 많이 타도 고요하다.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눈을 감고 있을 뿐, 옆 사람과 이야기하는 이는 없다. 그만큼 장벽이 있는 것처럼 개별적이다. 커다란 사무실 큐브 안처럼 버스도 그런 것 같다.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버스기사가 틀어놓은 음악은 알만한 가수가 부르는 트로트다. 트로트 경연에서 나왔던 곡들이 메들리로 흐른다. 강물이 흐르고, 음악도 흐르고, 차창에 빗물도 흐른다. 온통 흐르는 것들이다. 우리 인생도 흐르고, 추억도 흐른다. 노래에 실려 오는 옛 추억들. 그 옛날 언니들이 부르던 노래는 저리도 흐르건만 그들은 모두 어떻게 흐르며 살고 있을까. 불쑥 그리워진다.


마포 근처 모 단체 사무실에서 회의를 마친 시각은 정각 12시였다. 점심시간. 점심은 제공되지 않았다. 집까지 가려면 두 시간 가까이 걸리므로 점심을 해결하고 출발하는 게 나을 듯했다. 벌써 다섯 번째 만난 사람들인데도 친밀감 내지 유대감이 형성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제의했다. 내가 밥을 살 테니 점심 먹고 가자고. 일이 있단다. 또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그 역시 일이 있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할 수 없이 집에 가서 먹기로 하고 버스에 오른 참이다.


회의할 때는 진지하고 기탄없는 의견을 제시하고 조율한다. 의견이 일치할 때는 동지라도 된 듯 밀착된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그뿐, 회의가 끝나면 인사 후 각자 바삐 헤어진다. 늘 그렇다. 그런 것에 나는 익숙하지 못하다. 촌스럽게도. 이렇게 점심시간 직전에 회의가 끝나면 내가 꼭 밥이라도 사야 할 것처럼 조바심이 난다. 우리 집에 온 손님에게 식사 대접 안 하고 마는 것처럼 뭔지 민망하다. 오늘 점심 제의도 그런 기분 때문에 했던 거다.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모두 각자 있는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회의 외에 서로 친교가 이루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나이 차이가 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 오륙십 대다. 그 나이대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이 있는데, 그들은 지금 시대에 사회화가 잘된 듯하다. 나와 다르다. 그만큼 하나의 목표를 두고 다섯 차례나 만나 의견을 주고받았다면 친밀감 내지 유대감이 생길 만 한데, 별로 그렇지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이 볼 때 내가 달라 보일 수도 있다.


가끔 이렇게, 내가 있는 곳과 영 다른 곳에 갔을 때, 나는 촌스러움을 느낀다. 그 다른 곳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거기서 연출되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때다. 다 그럴까. 그걸 물어볼 수 없다. 그 어색함 때문에 그 자리에서 어서 벗어나고만 싶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이 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나마 오늘은 적극적으로 그들 중 누구에게 다가가는 행위를 했다. 내게 점심 먹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아마도 내게 심정적으로 한 발짝 가까이 왔을지 모른다.


다음 회의 때에는 그들이 내게 다정하게 말을 붙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먹지 못한 점심을 먹자고 할 수도 있다. 오늘 내 제의는 이웃에게 한 걸음 다가간 행동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섯 다리만 거치면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내가 아는 누군가의 또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의 지인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한강이 시야에서 멀어진 것도 놓쳤다. 조금 전까지 고요한 한강 풍경에 풍덩 빠져 있었는데, 한강은 보이지 않고 차창에 흐르던 비도 그쳤다. 햇살이 비쳤다 다시 구름 속으로 숨었다. 저 구름 속에 해가 빛나듯, 서로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우리들 외면 저쪽에 따스하고 말랑한 마음들이 자리해 있으리라 믿어도 될까. 불쑥 점심제의를 했던 내 행동에 스스로 온기를 느꼈다. 살짝 미소가 나왔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오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 의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즐기라던. 소리가 났다. 꼬르륵, 꼬르르륵. 내 몸이 건강해지는 소리다. 다음 회의가 기다려진다. 먼저 말을 건넨다는 건, 호의를 가지고 말을 건넨다는 건, 구름 속에 해가 빛나듯 그런 밝음일까. 마음이 밝아오는 것을 느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두통의 원인과 그것에서 벗어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