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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Sep 16. 2023

소년의 미소

일상

   

아파트 후문 한쪽에, 타이어에 바람 넣는 펌프와 먼지떨이가 있다. 산행을 하고 내려오면 으레 그곳으로 가 먼지를 턴다. 시원하게 나오는 바람. 바지와 등산화에 뽀얗게 들러붙은 먼지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며칠 전 일이다. 산에서 내려와 먼지떨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통통하고 귀염성 있게 생긴 소년이 자전거에 바람을 넣고 있었다.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다가가자 펌프질 하던 몸을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소년. 약간 비켜 앉는다. 먼지떨이를 사용하라는 제스처였다. 괜찮다고, 먼지 날리니까 먼저 바람을 넣으라고 했다. 소년은 나를 올려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어서 하라는 표현을 했다. 


잠시 후,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팽팽해진 자전거 타이어를 꾹꾹 눌러보더니, 옆에 있는 먼지떨이를 내게 건넸다. 인사를 꾸벅하면서. 고맙다고 하자 소년은 활짝 웃었다. 덧니가 귀여웠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땀 때문에. 푸른색과 흰색 줄무늬 셔츠가 귀염성스러운 얼굴과 잘 어울렸다. 


소년의 행동이 신선했다. 꾸벅 인사한 것과 먼지떨이를 꺼내준 그 행동이. 구푸린 채 펌프질 하는 소년에게 등산화에 붙은 먼지가 날릴까 봐 기다려준 것에 소년이 고마워했다는 것 아닌가. 또 볼일 끝났으면 그냥 가거나 가벼운 목례 정도 건네는 게 보통일 텐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먼지떨이를 꺼내주다니. 통통한 소년의 손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휭 하니 가버렸다. 그을린 탱탱한 소년의 종아리에 쏟아지는 햇볕이 깔끔하게 자른 머리와 통통한 등에 고루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건널목 앞에서 신호대기를 하며 슬쩍 나를 돌아다보았다. 내가 손을 흔들었다. 소년이 고개를 꾸벅하며 또 빙그레 웃었다. 신호가 바뀌자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건너갔다. 나는 소년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가슴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소년이겠으나 처음 보는 아이였다. 덧니와 통통한 손이 귀여운 아이.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중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그 아이의 미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아마도 성실하고 착하며 무엇보다 남을 배려하고, 받은 배려에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 같다. 적어도, 그런 아주 상식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게 틀림없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도 있으니.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고 하지만, 그게 모두 어른이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최초의 교육자는 부모이고, 주위 어른들이다. 그래서 아이를 탓하기 전에 나부터 돌아봐야 하는데, 그걸 망각하고 아이만 탓하기 일쑤다. 결국 아이들의 행동 모든 게 어른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것이다. 그 소년의 마음씀씀이를 보면, 그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주위 어른들의 모습이 보인다. 


등산화에서 먼지를 털어냈다. 뽀얗게 들러붙었던 흙먼지가 떨어지자 세탁한 것처럼 깨끗하다. 바지단도 털었다. 시원하고 강한 바람이 모든 먼지를 날려 보낸다. 내 마음속에 들어붙어 있는 먼지들도 다 털어낼 수 있을까. 욕심, 분노, 이기심, 교만 등등 그 모든 것들을. 그래서 저 소년의 미소 같은, 맑은 마음만 가득할 수 있을까. 


먼지떨이를 다시 자리에 걸어놓았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가벼웠다. 하늘에는 뭉게구름 몇 점 떠 있고, 아주 맑았다. 나리꽃이 아파트 꽃밭 한쪽에 피어 햇볕을 받고 있다. 활짝 피어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이 고왔다. 해맑은 소년의 미소를 닮은 나리꽃이었다. 


저 소년이 살아가는 세상은 작은 마음씀씀이를 읽어주는 사람들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저 하늘처럼 맑은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소년이 저 미소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언제나 나누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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