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요즘 맨발 걷기 열풍이 일고 있다. 여기 가도 맨발, 저기 가도 맨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맨발로 산에 오르다 흔히 듣는 말이, 괜찮으냐는 것이었고, 한동안 쳐다보는 이도 있었다. 요즘엔 관심 갖고 구체적으로 묻는 이를 자주 만나곤 한다. 그렇다. 나도 맨발 걷기 마니아다. 작년부터. 우연한 기회에 신발을 벗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고, 자주 맨발 걷기를 한다.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말에 과학적 근거를 들어 말할 수 없다. 그런 것은 인터넷 검색하면 수없이 많은 정보들이 올라와 있다. 나는 그냥 좋다. 발에 땅이 닿는 느낌이 좋고, 걸을 때 지압이 되는 것도 좋다. 어머니 품 같은 대지를 맨발로 딛고 서지 않은 사람은 깊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설명해도. 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것뿐 아니라, 내가 자연이라는 느낌. 그 안온함과 평안함을 언어로 설명하는 건 한계가 있다. 나는 그냥 좋다.
매일 같은 장소를 걷는 건 약간 지루하다. 뒷산에 오르다, 개울 물속을 걸은 것도 그래서다. 요즘 새로운 곳을 발견했다. 우연히. 산에 가도 갔던 길로 내려오기를 꺼리고, 운전을 해도 늘 다니던 길보다 새로운 길로 다니는 걸 좋아하는 나다. 익숙한 곳, 익숙한 길, 익숙한 모든 것이 편한 것은 맞다. 나는 그걸 꺼린다. 별스럽게도. 지금까지 살면서 중심이 되는 직업을 몇 번 바꾸었는데,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내 성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엊그제 가을비 오는 날이었다. 비가 오지만 운동을 쉴 수 없다. 쉬고 싶지도 않았다. 우산을 들고 나섰다. 우산 안으로도 비가 들이칠 정도로 빗줄기가 거셌다. 숲으로 들어가리라.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가면 그 거센 빗줄기를 피할 수 있다. 비 오는 날, 우산까지 쓰고 숲에 들어간다는 건, 운동 중독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인정. 난 어느 정도 운동 중독자다. 뭐든 하기로 하면 도중에 멈추는 일이 웬만해선 없다. 일종의 벽(癖)이 있다. 그것도 인정. 손목이 아파도, 바빠도, 이 잡문처럼 쓰는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는 것 또한 그 벽(癖) 덕분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작고 나지막한 산이 있다. 앞산이다. 산이라곤 하지만 산 같지 않은. 모처럼 그곳에 가기로 했다. 전에 더러 오르긴 했으나 시답잖아 뒷산에 주로 올랐다. 시답잖은 건 오르막 내리막 없이 거의 평지와 다름없어 산행하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산행이라고 할 만큼의 높이도 거리도 아니다. 산책로가 나 있긴 하지만.
비 때문에 뒷산과 개울은 위험했다. 앞산에 오르니, 입구에 밤이 두 개 떨어져 있었다. 주워 가방에 넣었다. 지난봄에 치과에 다녀오다 쪽동백 꽃에 이끌려 가보고 처음이다. 쪽동백나무 잎사귀가 노르스름해지고 그 아래 달개비꽃이 몇 피어 있었다. 숲엔 빗줄기가 거세지 않았다. 나무들이 막아주고 있기 때문에. 걸었다, 맨발로. 빗물이 고인 곳을 걸을 때, 찰방찰방 소리가 났다. 물장난하는 기분. 숲 속은 약간 어둑했다. 마을 앞이고 지나는 사람과 차량이 훤히 보이는 곳이니 괜찮았다. 자연스러운 산책로, 사람들의 발길에 저절로 만들어진 곳.
부드러운 흙길은 비 때문에 약간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솔직히 미끄러져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흙이다. 나무뿌리가 나와 있지 않고 돌멩이도 없는 완만한 길이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까. 아니 언제 이렇게 변했을까. 놀라웠다. 전에 왔을 적엔 이렇지 않았는데. 앞산 정상에 정자가 있었다. 마루가 놓인 정자는 깔끔했다. 걸레와 수건이 있고, 마루 밑에 긴 빗자루까지. 누군가 앞산과 정자를 관리하는 것 같았다.
비가 그친 다음날인 어제, 또 앞산에 올랐다. 입구에 알밤이 두 알 떨어져 있다. 주웠다. 전날과 달리 빗물이 빠진 산책로, 보송보송했다. 맨발을 땅에 댔다. 그 느낌은 비단보다 더 보드랍다. 밤나무와 쪽동백나무 오리나무 신갈나무 소나무 등에서 내뿜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걸었다. 자갈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완전한 흙산이다. 거기다 산책로를 누가 금방 쓸어놓은 듯했다. 옛날 우리 집 마당처럼 깨끗하다. 그대로 눕고 싶을 정도로. 나뭇잎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쾌재를 불렀다. 심, 봤다! 소리치고 싶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토록 맨발 걷기 좋은 곳이 있다니. 이제 한동안 내 맨발 걷기 장소는 앞산이 되리라. 집에서 가깝지, 흙산으로 보드랍지, 나무 울울창창하지, 가끔 밤 한두 개씩 떨어져 있지,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한 시간 넘겨 걸었다. 산새 지저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이렇게 맨발 걷기 좋은 곳이 있다니, 보물을 발견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명소다, 여긴 명소다.
나만의 명소, 거창하지 않아도 내게 만족한 곳이면 된다. 전국 방방곡곡에 맨발 걷기 성지가 있고 명소가 있다고 하지만 내겐 앞산이 맨발 걷기 명소다. 거기다 접근성까지 좋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오늘도, 나는 맨발 걷기 명소 앞산, 그곳을 걸으리라. 자박자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