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깜짝 놀랐다. 등산로에 길게 누워버린 떡갈나무. 잎사귀가 나뭇가지에 붙어 있었다. 아직 푸르고 싱싱한 채. 산에 오를 때 힘들면 붙잡던 떡갈나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밑동이 뽑힌 듯 부러져 있었다. 개미들만 분주하게 부러진 뿌리 주위에 오락가락했다. 뿌리가 썩어 바람에 쓰러진 모양이다. 어제 밤바람이 그다지 세지 않았는데, 이렇게 맥없이 쓰러지다니. 저렇게 속이 썩은 나무였던가. 하마터면 내가 붙잡았을 때 쓰러질 수도 있었을 텐데. 오싹해졌다.
어느 해 가을이었다. 상추씨를 텃밭에 뿌렸다. 때가 늦어 상추가 잘되지 않았다. 발코니 텃밭 상자에라도 심으려고 뿌리 채 뽑았다. 힘들었다. 쉬 뽑히지 않았다. 간신히 뽑고 나서 감탄했다. 얼마나 잔뿌리가 많던지. 그 여린 줄기에 무슨 뿌리를 그리 많이 달고 있던지. 뿌리만 족히 한 움큼 되었다. 겨울이 온다는 걸 알고 미리 준비를 한 것일까. 식물도 준비한다는 게 경이로웠다. 자연을 통해서 배우는 게 얼마나 많은가. 평생 농사만 지은 늙으신 어머니가 철학자 같다고 느끼는 것도 그래서일 게다.
가을걷이를 하며 상추포기를 뽑아 아파트 발코니 텃밭상자에 심었다. 겨우내 물을 주며 길렀다. 어느 때는 샐러드용으로 쓰고, 어느 때는 상추쌈으로 먹었다. 상자에서 파릇파릇 자라는 상추를, 하얀 눈이 내리는 풍경 속에서 바라보았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딱히 계절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른 온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상추는 잘 자랐다. 자라는 상추를 보며 텃밭에서 옮겨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상추 잎사귀를 뜯을 때마다 상추의 지혜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그 준비성 때문에. 준비성 없이 사는 사람들도 허다한데 식물은 본성적으로 그런가. 그 본성을 지키며 산다는 게 힘들다는 생각을 가끔 하기에 상추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 자체가 본성을 지키며 살기가 어렵다. 숱한 제약들 때문에 본성대로 살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튼 상추를 지켜보며 저절로 배우는 시간을 가진 겨울이었다. 상추가 추운 겨울을 준비해 잔뿌리를 많이 달고 있는 것처럼, 다가올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되리라.
쓰러진 떡갈나무 잎사귀가 무성한 것을 보며, 뿌리가 썩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겉을 보면 안을 볼 수 있다는데. 또 겉만 봐서 속을 알 수 없다는 말도 있으니, 이리저리 재보고 살펴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말인지. 어쨌든 쓰러진 나무를 보며 기분이 착잡했다. 나도 모르게 내 속도 썩고 있는 게 없나 싶어서. 단단히 자신을 살펴봐야 하리라. 알게 모르게 드러나는 것에만 신경 써 속이 비어 가는 건 없는지. 이런저런 찬사에 익숙해 자신을 수양하는 것에 소홀한 것은 아닌지.
산에 오르는 길이 무거웠다. 바람조차 불지 않아 얼굴과 등에 땀이 줄줄 흘렀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더 그랬다. 삶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게 생활화된 줄 착각하고 산 것 같아,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언제나 제대로 된 사람이 될까. 순간적으로 교만해지고, 착각에 빠지고, 그것에 경도돼 정신없이 흘러가 버리고 마는 이 부족함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저리도 훅 쓰러져 버리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부끄럽기도 했다. 발걸음은 더욱 무거웠다.
동박새는 언제나처럼 오리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나를 보고 주둥이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포르릉 날아 때죽나무 가지로 옮겨 간다. 발아래는 자디잔 풀꽃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개미들이 줄지어 움직인다. 모두들 자기들의 방식대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꿩도 푸드득 숲 속에서 날아오른다. 아기 고라니도 저만큼에서 펄쩍펄쩍 뛰어간다. 모두 본성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못난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전화벨이 울렸다. 친구다. 뭐 하냐고 물었다. “나무가 쓰러졌어. 뿌리가 다 썩었더라구. 겉은 말짱한데 뿌리가 썩으니까 맥없이 쓰러졌네. 어떡해?” 친구는 의아한 듯 무슨 말이냐고 했다. “나도 그런 거 아닐까. 무서워.” 우리는 서로 동문서답하고 있었다. “아, 전화 잘못 걸었나 보네요.” 뚝. 친구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동박새는 여전히 지저귀고 벌은 윙윙대며 날았다. 쓰러진 떡갈나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썩은 뿌리에 오가는 개미들도. 산에서 내려가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산에 올랐다. 오늘은 뿌리를 보고 배운다. 이렇게 배우는 자세를 견지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산 정상이 저만큼 보였다.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