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
이맘때면 밤새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야트막한 산 밑, 자그마한 동네 가운데 자리한 초가집, 우리 집이었다. 슬레이트로 지붕 개량을 하기 전에 그 집에서 이사했기 때문에, 내 기억 속의 그 집은 초가집이다. 싸리나무로 엮어 단 사립문, 작은 안마당, 나무 쪽문이 달린 부엌, 방 두 개, 나중에 새로 지은 행랑채와 헛간, 안마당보다 널찍한 뒤란, 한쪽에 담배건조실, 골담초와 앵두나무, 황매화 넌출진 울타리. 소박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그런 집이었다. 가을이면 뒷산에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물리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니, 환청 내지 상상이라고 해두자.
천변 산책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나를 자주 끌고 들어간다. 그것은 개울이 내포하고 있는 서정성 때문인 것 같다. 개울 물속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물고기가 있듯, 물속 같은 내 기억의 창고 속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을 하나 둘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한 만큼 산책 분량을 채우곤 한다. 이것까지 분량을 정한다는 건 근대적 삶에 경도된 모습일 거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늘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자유롭다 해도 어느 정도 계획된 가운데 살게 되는 게 보통이니까. 그것은 근대적 시간 개념이 몸에 배어들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이제 그 근대적 시간에 따라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시대를 역행하겠다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자연의 시간에 따라 살아보자는 의미다. 내 몸속에 잠자고 있는 태고 적 시간을 깨우고 싶다. 유전자 속에, 오래오래 더 오래전, 자연의 시간에 따라 살아가던 선조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내 몸 어느 구석진 자리에 아주 작은 입자로 웅크리고 있는 그것을. 그래서 자연의 하나로 살고 싶다. 근대적 시간에 따르지 않고, 자연의 시간을 따라.
산속 오솔길보다 약간 넓은 산책로, 오른쪽으로 개울을 끼고 걷는 길. 아파트가 뒷산과 앞산처럼 높게 서서 숲을 이루고, 저만큼에 간단없이 오가는 차량과 소음, 때로는 많고 적은 산책자들, 시끄러운 도시의 전형이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나는 게 어렵지 않다. 내게는. 여럿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처럼, 혼자 있어도 여럿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내가 도시에 살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게 바로 이 점이다. 꿈속에서 날고 싶다 생각하면 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환경을 연출해 낸다, 어느 정도는.
그래서 계획 하나를 버렸다. 아니, 전환했다. 바로 전원에서 살고 싶은 꿈이다. 나이 먹으면 산골로 들어가, 아주 작은 집 짓고, 텃밭 조금 가꾸고, 적게 먹고, 많이 자고, 산책 많이 하고, 책 읽고, 마음껏 글 쓰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살겠다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계획을 바꾸었다. 도시 속에서도 그렇게 살리라 마음먹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어느 정도 가능했기 때문에.
산이 건너다 보이는 서재에서 독서하고 글을 쓰며, 산속 어느 작은 집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거실 가득 들어온 하늘을 볼 때도. 가끔 활강하듯 나는 수리매가 유리창을 통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럴 때 상상은 더욱 깊어진다. 창가로 찾아온 동고비, 정원수에 앉은 직박구리, 눈앞에 펼쳐진 산야의 풍경들 속에서, 나는 내 기억 속의 그 집을 떠올린다. 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밤새 울던 부엉이 소리도.
산책로를, 숲 속으로 난 조붓한 오솔길이라 생각하며 걷는다. 길옆에 파릇한 풀이 보인다. 이 한겨울을 보내면서, 눈 속에 묻혀 있으면서, 파릇한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풀은 군자를 연상시킨다. 어느 것에도 흔들림 없이 자기의 본모습을 견지하고 있는. 그 모습을 닮고 싶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개망초다. 봄맞이꽃풀이다. 소루쟁이다. 아, 별것도 아닌 너무도 평범하고 흔한 풀이다. 풀에게 말을 건넨다. 조금만 더 견디라고, 곧 봄이 온다고.
청둥오리 여러 마리가 물속에서 유유자적한다. 그중 하나가 작고 발그레한 발을 얼음 위에 디디고 서 있다가 천천히 걷는다. 딴청 피우는 아이 같다. 발이 시릴 것 같다. 간신히 얼음 위를 지나 물속으로 들어간다. 저만큼 가버린 오리 떼를 따라 힘차게 헤엄친다. 물속에서 얼마나 발을 재빨리 움직였을까. 무리들을 따라잡는다. 아마도 맨 앞에 있는 대장오리가 속도를 조절했을지 모른다. 함께 가려고. 또 깨닫는다. 뒤떨어진 동료를 위한 배려, 그것.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가.
그때를 잊고 있었다. 경쟁이 아닌 함께 더불어 살던 오래전 그때를. 모든 게 화폐로만 환산되지 않고, 정을 주고받던 그때를. 뒷산에서 들리던 부엉이 울음소리에 잠 못 들며 뒤채던 소녀 적 나를. 부자가 아닌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듣고 자라던 그때를. 맞을지언정 밖에 나가서 누구 때리지 말라고 가르치던 할머니를. 다 잊은 것처럼 살았다. 현대인으로 살기 위해, 그것에 길들여져서.
그래도 기억 속의 그 말랑한 것을 잡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현실주의자면서 이상주의자였다. 현실에 몸을 대고 있지만 정신은 이상을 좇았다. 상충된 그것들이 나를 갈등하게 휘두를 때 많았다. 그때마다 떠올렸던 것이 어릴 적 내가 살던 그 집과 삶의 방식이었다. 결핍된 것은 많아도 순수가 바탕이 되었던 그때 그 집, 말랑한 것들이 삶의 중심이 되어 나를 키우던 그 집. 그것을 모두 잊지는 않으리라 몸부림쳤다. 그 흔적이 지금의 나다.
어릴 적 그 집과 완전히 다른 지금 살고 있는 내 집이 저만큼 보인다. 아파트, 지극히 현대적 주거 양식. 그 안에 삶의 방식만은 말랑한 것들을 담으며 살리라. 가족애, 이웃의 정, 따뜻함, 소박함, 너그러움, 용서, 사랑, 웃음, 자유로움 등. 그럴 수 있을까. 현대적 삶의 방식에 진하게 물든 의식을 다 갈아엎어야 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