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몸이 좋지 않아 가볍게 천변을 산책하곤 했는데. 집에서 나오면서부터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산에 오르고 싶은. 아파트에서 나오면 바로 등산로 입구다. 산길로 들어설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렇게 바로 연결된 게 고맙다는 것이다. 고향집도 그랬다. 뒤란에서 바로 산으로 연결된다. 거긴 산골이어서 그렇다고 해도, 도시에선 흔치 않은 입지조건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에 들어섰다. 계절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은행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한 잎도 남지 않고 떨어진 은행잎이 초겨울 바람에 마르고, 흐드러졌던 감국도 둔덕에 줄기만 거뭇거뭇 마른 채 서 있다. 개망초만 누런 잎 속에 파란 속잎을 싸안고 있다. 벌써 봄을 기다리는 것일까. 마른 잎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서 있는 신갈나무, 오리나무, 팥배나무. 나무둥치를 쓰다듬어 보았다. 찬바람 속에서 약간 온기를 느낀다.
산속으로 난 등산로는 조붓했다. 떨어져 누운 낙엽 위로 난 사람의 발자취. 반지르르한 길을 따라 걷는다. 바람을 막아주는 나무들. 내 삶의 여정에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저 나무처럼 막아주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제 나 또한 그래야 하리라. 필요한 사람에게 마음 한 자락 내어주면서 살아야 하리라. 산속은 따뜻했다. 웅웅대는 바람소리를 귀전으로 흘리며 한 걸음씩 천천히 걸었다. 숨이 차도 멈추지 않고.
멈추지 않고 걸어야 하는 것이 산행뿐일까. 인생도 그러하다. 부단히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게 어디 있을까. 자라는 것도, 배우는 것도, 사는 것도, 이렇게 쓰는 것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잠시 쉴지언정. 잠깐의 쉼을 얻기 위해, 그 달콤하고 안온한 순간을 얻기 위해, 걷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참된 쉼의 가치와 맛을 느낄 수 있으니까. 가끔 앓는 것은 쉼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거다.
내가 좋아하는 구간에 접어들었다. 양쪽으로 늘어선 신갈나무 속에 두 그루의 후박나무가 있는 길. 그 옆에 밤나무와 쪽동백나무도. 아, 솔잎과 가랑잎이 폭신하게 깔려 있는 길. 후박나무 넓적한 잎사귀가 뒹굴고 있다. 꼭 담요 깔린 안방에 누워 장난치는 아이들처럼. 가만가만 마른 낙엽을 밟는다. 바스락바스락. 그들의 언어로 내게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낙엽 덮인 고즈넉한 산길은 평온함을 준다. 산에 오르는 맛이다. 자연 속에서 또 하나의 자연이 된 나를 느낄 수 있기에 그러하리라. 욕망하는 것 하나 없는 무연한 상태. 자기의 숨소리와 자연의 소리만을 들으며 마음을 비울 수 있고, 오롯이 나와 마주하는 시간. 내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그 시간이 필요해서리라.
오색딱따구리가 신갈나무를 쪼고 있다.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공생관계. 딱따구리는 신갈나무 속에 있는 벌레나 알을 먹기 위해 부리로 수없이 쪼아댄다. 신갈나무는 아프다는 소리 하나 없이 그것을 견딘다. 그래야 새봄에 건강한 나무로 새잎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한동안 서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글쓰기와 나도 공생관계일까. 고개가 끄덕여진다. 생각해보면 힘들 때 쓰면서 견뎠다. 쓰지 못할 때도 쓰고 있었다. 마음으로. 발화되지 못한 말처럼, 표현되지 않는 언어들을 곱씹고 배열하며 견뎠다. 그러다 쓸 만한 의지가 생기면 무엇이든 썼다. 이제 쓰는 게 고통이 아니고 즐거움이 되었다. 종교는 영혼을 구원하지만 글쓰기는 마음을 구원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설득력 있다. 영혼과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으나.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파란 하늘. 티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은 호수 같다. 빛나는 초겨울 햇살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따사롭다. 내 얼굴에, 몸에, 햇살이 부딪쳐온다. 찬바람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따사로운 햇살. 나무에 기대어 서서 맞아본다. 손을 뻗어 나무를 만진다. 온기를 느낀다. 가끔 윙하는 바람소리도 다정하게 들린다. 하늘과 나무와 햇살 그리고 바람, 나와 하나가 된다.
다시 걷는다. 이게 무슨 일인가. 누군가가 산길을 빗자루로 쓸어놓았다. 나뭇잎 덮인 길, 돌 부스러기 낭자한 길을 말갛게 쓸어놓았다. 신발을 벗는다. 양말도. 맨발로 산길을 걷는다. 한동안 걸으니 발바닥이 얼얼하다. 그래도 참고 걷는다. 몸이 데워지니 조금씩 나아진다. 다시 양말과 신발을 신고 목적한 곳까지 걷는다.
산에서 내려와서 하늘을 보니 낮달이 떠 있다. 하얀 반달이 맑게 웃는 것 같다. 이제 몸이 훨씬 나아졌다. 쉼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또 걸어야 할 시간이다. 기대된다. 앞으로 걸어갈 나날이. 저 달이 가득 찼다 이지러지고 다시 가득 차오르는 것처럼, 나의 삶도 그런 반복 속에서 나아갈 것이다. 나도 개망초처럼 벌써 봄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