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명절에는 먹어주는 게 예의

행복

by 최명숙


추석에 온이로부터 초대받았다. 맛있는 거 많이 하니 놀러 오란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딸네 식구가 인사하러 오는 게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온이들이 놀 마땅한 것이 없고, 오고 가는 길 막히면 피곤할 테니 우리가 가기로 했다. 아들도 쾌히 승낙. 추석날 아침 일찍 성묘하고 바로 출발했다. 온이들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딸에게 진즉 물었다. 어떤 음식을 해가지고 가는 게 좋을지. 전이나 나박김치 또는 잡채 등. 딸은 거절했다. 절대로 해오면 안 된다며. 이미 재료를 다 사두었으니, 그냥 오란다. 그래도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마음 불편하다고 했다. 딸은 자식 집에 오는데 왜 마음이 불편하냐며, 그런 생각 말고 속 다 비우고 오라며 웃었다. 편히 가기로 했다. 아들도 그게 좋겠단다. 나이 들면 자녀들 말을 잘 듣는 게 부모 역할 잘하는 거라는 말도 있으니, 나도 그러기로.


명절에 온이네로 가는 게 처음은 아니다. 사돈부부가 올라오셨다 가고 나면 우리가 간 적이 자주 있다. 이번엔 사돈들이 해외여행을 가셨기 때문에 추석 당일에 오라고 했다. 딸은 가족끼리 오순도순 시끌벅적 보내는 게 좋단다. 시어른들이 오시거나 시댁에 가는 것도 무척 좋아한다. 다행. 명절날은 그 기분을 내야 한단다.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웃고 떠드는 것 말이다. 아무튼 딸은 야단법석 떠는 게 좋다고 했다.


도로 사정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왼쪽으로 한강을 끼고 달렸다. 금잔화와 때늦은 장미가 피어 있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 걷는 사람들. 아직 아침나절인데 시민들은 벌써 한강변에 나와 있었다. 동부간선도로는 언제나 풍광이 좋다. 도로가 막히지만 않으면 그 좋은 풍광을 보며 드라이브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줄기 폭이 좁아지고 저만큼에 인수봉이 보였다. 이제 거의 다 왔다. 한 시간 남짓, 이만하면 잘 온 셈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온이와 또온이가 달려와 안겼다. 온이가 말했다. “약속 지키셨네요.” 방긋 웃는다. “삼촌은 제가 준 충전기 잘 쓰고 있나요?” 온이가 뽑기에서 뽑은 것으로, 전에 아들에게 선물한 물품이다. 그걸 기억하고 묻는 게 귀여워서 우리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또온이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콧물이 줄줄 흐르고 열이 조금 높았다. 이제 제법 말을 하는지라 어디가 아픈지 물었다.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단다. 아이들이 하는 양이 귀여워 웃고 또 웃었다.


적당하게 익힌 갈비찜과 갖은 야채가 들어간 잡채, 동태전과 꼬치, 동그랑땡. 나물들.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장만했을까 싶게 다양한 음식들. 나박김치까지. 왜 이렇게 많이 준비했느냐고 했더니, 명절에는 살찔 걱정하지 말고 많이 실컷 먹어야 한단다. 참나. 딸다운 발상이다. 딸은 뭐든 후한 편이다. 남에게 줘도 후하다싶게 준다. 체구는 작은데 손은 크다. 마음씀씀이도. 옛 어른들이 본다면 맏며느릿감이라고 할 거다. 나는 솔직히 그게 조금 마음에 안 들지만.


무엇이든 아끼고 허실 되지 않게 애쓰며 산 나와 형편이 다르고 시대도 다르다. 그건 인정. 그래도 내 입장에서 보면 약간 과하다 싶을 때 있다. 잔소리로 들릴까 봐 이야기 중에 슬며시 끼워 넣어 말하면, 맞는다고 하면서도 그냥 그대로다. 관계만 나빠질까 우려되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사부인 눈치가 보여 언젠가 대화 중에 딸 흉을 보았다. 사부인은 오히려 그렇게 넉넉한 마음씀씀이가 좋단다. 그렇다고 헤프진 않으니 걱정 말라고, 오히려 손이 커야 잘 산다며. 좋은 시댁 만난 게 복 중의 복이다.


아무튼 음식은 무척 풍성했다. 실컷 먹고 이야기했다. 딸과 사위는 식탁 치우고 집 청소할 때, 우리는 놀이터에서 온이들과 놀았다. 활발하게 잘 노는 아이들을 보는 게 행복이다. 온이는 놀이터에 온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또온이도 미끄럼틀에 올라갔다가 쭈욱 타고 내려왔다. 아들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아빠미소’ 띠고 바라보았다. 하늘은 차츰 맑아졌다. 햇살이 놀이터를 가득 채웠다.


놀이터에서 두 시간 가까이 놀다 들어와 보니, 딸은 부엌에서 또 무언가 하고 있었다. 꽃게 찜이다. “하, 또 먹어?”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내가 말했지? 명절에는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명절에는 먹어주는 게 예의야.” 딸의 말에 아들과 사위가 박장대소하고 웃었다. 온이와 또온이는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 웃었다. 누가 정한 예의인지 모르겠다며 나도 웃고 말았다. 딸은 부엌에서 신이 난 듯했다. “근데 왜 반말이야!” 내 말에 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시비 걸지 마! 바빠!”라고. 웃고 말았다.


우리는 꽃게 찜을 먹고, 온이들은 게살을 넣어 만든 죽을 먹었다. 다 먹고 나자 볶음밥이 나왔다. 과일까지 먹고 나니 세상에서 부러운 게 하나도 없는 듯했다. 딸은 일류 요리사 같았다.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나도 못하는 꽃게 요리를 척척 해내는 게 놀라웠다. 모두 시어머님께 배운 거란다. 사부인 덕분에 내 입이 호강하는 셈이다.


그렇게 먹고 또 먹고, 웃고 또 웃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강 다리와 주위 건물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아들은 온이와 또온이 이야기만 계속 늘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우리 온이들’이라는 말에, 네 자식 낳으면 더 예쁠 거라고 맞받았다. 아들은 빙긋 웃기만 했다. 행복하고 넉넉한 추석 명절이었다. 내년에는 내가 준비해서 초대하리라. 그때는 온이들도 커서 괜찮을 테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 어머니의 애청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