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외손자 온이와 산책하기, 언제나 즐겁다. 마냥. 그래, 마냥이다. 온이도 그런가보다. 우리는 누가 먼저 제의하든 서로 웬만해선 거절하지 않는다. 내가 “온아, 우리 산책할까?” 하면, 온이는 늘 “네, 좋아요.” 한다. 온이가 우리 산책할까요? 묻기도 하는데, 그럴 때 나도 좋다며 나선다. 둘이 손잡고 나설 때 또온이가 따라나서기도 한다. 그러면 유모차에 태우고 중랑천 산책로를 걷는다.
다음에 하자며 미룬 적이 두어 번 있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다. 금세 시간이 흘러 산책을 못했을 때 간다고 일어서면, 온이는 산책도 못했는데 왜 가느냐고 성화다. 못 가게 잡는다. 할 수 없이 떼어놓고 나올 때, 섭섭한 표정으로 힝힝거린다. 가끔 좌절을 겪는 것도 교육상 필요하단다. 다음에 와서 산책하자며 달래 놓고 나온다. 그럴 정도로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산책을 즐긴다.
추석에 다녀왔건만 이틀 후 딸이 전화했다. 사위는 출근했다며. 올 수 있느냐고. 또온이가 아픈데 혼자 둘을 데리고 병원에 가기 힘들단다. 전화 예약을 받지 않아 직접 가야 하고, 진료까지 두세 시간 기다려야 해서, 온이가 지루해 못 견딜 거라고. 온이 생각해서 가기로 했다. 부르면 달려가는 게 요즘 내가 할 수 있는 어미노릇이다. 시간만 허락하면 만사 제치고.
또온이와 딸은 병원에 남고 온이와 나는 병원에서 나왔다. 아픈 아기들과 보호자들이 가득 차 있는 병원에 있을 수 없었다. 온이와 손을 잡고 걸으며 물었다. “우리 뭐 하지?”라고. “산책이요.” 온이는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좋아.” 내 말에 온이는 싱긋 웃었다. 나를 닮았을까. 산책 좋아하는 것이. 선뜻 선택하는 게 놀이터 아니고, 장난감 가게도 아니고, 산책이라는 게 신기하다. 만 4세인데.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중랑천 상류 천변이다. 물은 깨끗했다. 왜가리가 있었다. 온이가 물었다. 저 새가 뭐냐고. 왜가리라고 했다. 노랗게 핀 꽃을 보고 또 물었다. 저 꽃이 뭐냐고. 애기똥풀꽃이라고 했다. 왜 애기똥풀꽃이냐고 물었다. 줄기를 꺾으면 애기똥처럼 노란 물이 나와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했다. 달개비꽃, 씀바귀꽃, 개망초꽃. 새로운 꽃만 보면 물었다. 일일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가다가 알려준 꽃이 나오면 내가 물었다 무슨 꽃이라고 했지? 하면서. 온이는 기억하기도 못하기도 했다.
“아, 저건 민들레꽃이에요.” 온이가 아는 꽃도 있었다. 그뿐 아니다. 강아지풀과 토끼풀을 알고 있었다. 벚나무도. 기특했다. 식물에 관심을 갖는 모습이. 자연물에 관심을 갖다 보면 배우는 게 많으리라.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차츰차츰 깨닫게 되리라. 공부는 저절로 깨우치는 게 좋다. 그것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던가. 구름 한 점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온이는 ‘하늘에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다’고 표현했다. 꼭 안아주었다.
구기자 열매를 보고 온이가 예쁘다고 했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친김에 여러 장. 포즈를 취한다. 웃는 표정, 화난 표정, 찡그린 표정, 손을 들고, 발을 들고. 모델처럼 이 포즈 저 포즈. 한참 걸었는데 힘들다는 말도 없이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걸었다. 온이는 수다쟁이다. 묻는 것이 많고 아는 것도 많다.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집에서 있을 적엔 또온이와 싸우기도 하는 온인데.
산책하다가 불쑥 내게 물었다. 또온이 아파서 어떡하느냐고. 싸울 때는 언제고 걱정을 한다. 그것도 기특하다. 치료받으면 나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온이는 금세 쨍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싸우면 딸은 말한다. ‘형제의 난’이라고. 웬만큼 싸우는 것은 아이들끼리 조율하도록 내버려 둔다. 심각해질 때 개입하더라도. 그런 교육법이 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사십여 분 족히 걷고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에 온이가 말했다. 저쪽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온이도 나처럼 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건 싫어하나 보다. 좋다고 했다. 어느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을 때, 계단에 포플러 잎사귀가 무수히 떨어져 있었다. 포플러나무 낙엽이라고 말해주었다. 마른 낙엽을 밟는데 소리가 났다. 온이가 말했다. ‘빠사사삭’ 소리가 난다고. 그게 맞다. 바스락 소리가 아니었다.
병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딸이 전화했다. 지금 막 진료 마치고 근처 약국에 있다고. 우리는 약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핀 들꽃을 보고 물었다. 온이는 두 가지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애기똥풀꽃과 달개비꽃을. 어려운 이름인데 잘 기억한다고 칭찬해 주었다. 온이가 내 손을 잡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싱긋 웃으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렇게 건강하고 맑게만 자라라, 속으로 말했다.
총 산책 시간, 한 시간 이십 분. 걸음 수, 오천 팔백십오 보. 온이가 새롭게 얻은 정보, 왜가리 이름과 애기똥풀꽃 달개비꽃 씀바귀꽃 이름. 온이와 산책 항상 좋지만 그날이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