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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을 끓이다

생일

by 최명숙

내 생일. 미역국을 끓였다. 생일이라 해서 스스로 국거리 한우를 사고 미역국을 끓인 건 처음이다. 그만큼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그럴 마음의 여유 없이 살았다. 딸이 결혼하기 전에 끓여놓은 적은 있었던 것 같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도 명확하지 않다. 이제서 생일을 스스로 챙기다니, 나도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결혼하기 전까지 생일상을 받았다. 친정에서. 어머니는 미역국을 끓이고 자반을 구웠다. 참기름에, 불려 씻은 미역을 넣고 달달 볶은 다음, 쌀뜨물을 넣어 끓인 미역국. 노릇노릇 구운 자반. 아궁이에 남은 불을 끌어내 석쇠를 올리고 거기에 구워낸 자반. 세상천지에 그렇게 맛난 생선이 있을까. 나물 몇 가지와 함께. 생일상에 오른 반찬으론 최고다.


그뿐인가. 할머니는 찰 올벼를 미리 조금 베어 벼훑이에 훑어 말린 다음 절구에 찧어 찹쌀을 만들었다. 그걸 쪄서 콩고물에 버무린 인절미, 그 맛을 어찌 잊으랴. 집을 떠나 있을 때 빼고, 집에 머물 적엔 그렇게 정성스러운 생일상을 받았다. 할머니는 인절미와 수수경단을 만들어주며 항상 말씀하셨다. “시집갈 때까지 이렇게 떡을 해주면 잘 산단다.”라고.


결혼하던 해 생일날이었다. 아침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갔더니, 시아버님께서 자전거에 소고기와 미역을 사서 싣고 오셨다. 그 이른 아침에 읍내까지 나갔다 오신 거였다. “아가, 오늘 생일이잖니?” 빙긋 웃으며 건네주시는 고기와 미역을 받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른 아침에 어디서 사셨을까. 문을 연 가게가 있었던가. 얼마나 이곳저곳 문 연 곳을 찾아다니셨을까.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아침에 읍에 다녀오신 모양이었다.


그 후 분가해 살 때 삶이 녹록하지 못했다. 늘 허둥대느라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못했다. 특히 나와 관계된 것에는. 남편과 아이들 생일은 챙겼으면서. 아이들이 크면서 선물을 내밀거나 같이 외식을 했다.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진 않았고. 미역국도. 미역국을 좋아하지 않는 나였다. 딸이 결혼하면서 부쩍 챙기기 시작했다. 추석 지나고 며칠 후인지라 만나고 또 만나는 게 번거로워 관두라고 해도.


어제 마트에 가서 무심코 국거리 고기를 사고, 미역을 샀다. 갑자기, 힘들게 나를 낳고 미역국 드셨을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 노고를 생각해서 미역국을 끓이고 싶었다. 이제 철이 드는 걸까. 나를 위해, 내가 세상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미역국을 끓이는 게 아니라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머니의 노고를 잊지 않기 위해서 끓여야 되는 미역국이었는데.


아침에 아들이 식사준비를 하겠단다. 거절했다. 내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정성껏 미역국을 끓이고 싶었다. 아들은 엉거주춤 부엌에 서 있었다. 마음만 받을 테니 조금 더 쉬라고 했다. 미역국 끓이고, 나물 몇 가지 무치고, 김 잘라 놓으니 생일상이 제대로 차려졌다. 아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점심은 아들이 대접한다고 해서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드라이브 조금 하고, 점심 먹고, 카페 가서 차 마시고, 쇼핑도 했다. 아들에게 화장품과 구두까지 선물로 받았다. 딸도 축하금을 두둑하게 보냈다. 그뿐 아니다. 제자들의 선물도 풍성했다. 몇 년째 무소식이던 제자까지. 전화번호만 알면 얼마든지 선물을 보낼 수 있는 세상이다. 제대로 선생 노릇 못한 것 같은데, 기억해 주는 게 놀랍기만 했다. 내가 한 것보다 많이 받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진 않으나, 사랑의 빚이니 기꺼이 지기로 했다.


저녁 산책하면서 어머니께 전화했다. 작년까지 생일에 꼭 전화를 했는데, 올해는 잊으셨단다. 미역국 끓여 먹었느냐고 묻기에, 엄마 생각하며 끓여 먹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웃었다. 잘했다며. 옛날이 생각나는지 미세하게 한숨도 쉬고. 출산의 고통, 여성이 짊어지고 있는 숙명. 이 나이가 되어서야 어머니의 출산을 떠올리다니. 나는 참으로 늦되는 사람이다.


올 생일에 손수 끓인 미역국, 맛있었다. 소고기 충분히 넣고 미역 잘 불려서 푹푹 끓인 미역국, 거기에 어머니의 노고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첨가했으니, 맛이 없을 리 없다. 올해는 어느 해보다 풍성하고 행복한 생일을 보냈으니, 행복총량의 법칙이 벌써부터 적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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