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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25. 2023

겉의 병, 마음의 병

    

산책로가 쓸쓸했다. 얼마 전까지 피어 있던 구절초와 쑥부쟁이꽃이 다 졌고, 베고니아 단지 꽃들이 무서리를 맞았을까, 시커멓게 변해 흉측한 모습이었다. 버드나무 잎사귀도 떨어져 날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왜가리와 물오리마저 안 보였다.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산책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 한 곳을 찬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낮달만 동쪽 하늘에서 하얀 얼굴을 내밀었다.


여름내 가으내 발을 담갔던 곳을 지났다. 갈대가 무성한 산책로, 센 바람에 꽃대를 흔들었다. 산발한 여자의 머리 같다.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는 데 산책만 한 것이 없다. 나는 그렇다. 복잡하다 못해 우울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데. 우울감은 의욕을 저하시켰다. 기분이 가라앉고 세상이 잿빛으로 보였다. 그걸 떨쳐내야 한다. 원인은 아무래도 손목 때문인 듯했다.


우울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왔다. 컴퓨터를 열었다. 가슴이 울컥거렸다. 아프니까 슬프다. 서럽다, 서럽다 해도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 이제 입에 담는 것도 역겨울 정도다. 이렇게 낫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벌써 몇 달인가. 넉 달이 되어간다. 아껴 보고, 모셔도 보고,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도 받았건만 만족할 만큼 쉬이 낫지 않는다. 조금 덜한 듯해서 집안일을 하거나 급한 원고 쓰고 나면, 영락없이 또 욱신거린다. 겁이 덜컥. 이러다 영영 낫지 않는다면 어쩌나 싶다. 물리치료사 말이 낫더라도 무리하면 다시 도진단다. 그럼 낫는다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손을 안 쓰고 어떻게 산단 말인가.


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니고,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이것 때문에 이렇게 우울할 것까지 없지 않은가. 까짓, 정 안 되면 깁스라도 하고 손을 안 쓰는 방법도 있는데. 혼자 이러쿵저러쿵 궁리해 본다.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 사는 일이 왜 이다지 복잡한지. 공연히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마음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더 중요한 건 이것인지도 모른다. 겉에 든 병이야 의사가 치료하면 될 일이다. 마음은 본인이 치료하면 될 일이고. 남이 치료하는 것보다 내가 치료하는 게 더 쉬울 텐데, 그게 안 되니 갑갑한 노릇이다.


이것 가지고도 이렇게 심란한데 큰 병 앓고 있는 사람은 어떤 심정일까. 남의 큰 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말도 있듯이, 사람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나 또한 그렇다. 이 우울의 원인은 현재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서였다. 조급해서일지도 모른다. 얼른, 빨리 낫지 않는다고 말이다.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꾸준히 치료받아야 한다. 그것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서 효과를 기대하는 내가 문제다.


주위에 나처럼 손목 아파본 사람이 꽤 있다. 모두 기다려야 한단다. 낫긴 낫는다고 하니, 그게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그게 도대체 언제냐고 소리치고 싶다. 넉 달 되었다고 하니, 자기는 일 년 가까이 아팠다고 한다. 맥 빠지는 소리다.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다고도 했다.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앞에 닥치는 일들을 미루고 미루다 어느 날 급하게 처리할 때도 있다. 운전하면 안 되고, 타이핑도 하면 안 되며, 물건을 들어도 안 된단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다.


이러다 성격 변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소리칠 일이 많으니까. 온화하고 넉넉한 것이 내 상징인데(?) 전혀 다른 성격이 돼버릴 것만 같다. 온화하고 넉넉하다는 말은 자의적인 표현이니 오해 마시길. 실소가 나온다. 지인들은 오죽하랴. 다 괜찮다. 지금 나는 그 통증을 참고 이렇게 타이핑을 하고 있는 중이니, 이만하면 넉넉한 성격의 소유자 아닌가. 이렇게 헛소리라도 하면서 어젯밤 쓰다 만 이 글을 오늘은 기필코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러고 싶다.


생각해 보면 나는 건강한 편이었다. 어릴 적엔 병치레가 잦았는데, 열댓 살 넘으면서 건강해졌다. 그 후론 잔병치레도 거의 없었으니까. 늙느라고 이런 걸까. 작년엔 위염으로 고생했는데, 올해는 손목이 아파 고생이다. 그 흔한 감기도 잘 걸리지 않던 내가. 그렇게 일을 많이 하고 잠을 충분히 못 자도, 피로감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는데.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이런저런 변화를.


엊저녁 산책로에서 보았던 시커멓게 시들고 마른 베고니아가 어른댄다. 흉측해 보인 베고니아에 연민을 느낀다. 심지어 의젓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으려 애쓰는 모습이. 우울감을 떨쳐내야 한다. 언젠가 낫긴 낫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못 걷지 않고 못 먹지 않으니, 손목 아픈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긍정의 힘을 믿자. 겉의 병을 고치는 사람은 의사지만 마음의 병을 고치는 사람은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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