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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21. 2023

한 가지 결심

    

그렇다, 여유였다. 도서관에서 몇 시간 동안 독서에 집중한 게. 큰 글자로 된 산문집 두 권을 읽었다. 마음이 평온했다. 의자까지 안락했고.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독서삼매에 빠졌다. 가볍게 읽기엔 산문집이 적절하다. 장편소설을 읽을까 싶어 꺼냈는데, 갑자기 무슨 변덕인지 지루한 느낌이 들어 다시 꽂아두고, 산문집을 꺼냈다. 타인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옆이나 뒤를 별로 돌아보지 않고 사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린 내게, 어쩌면 꼭 필요할지 모르므로. 


도서관에서 책 읽기, 내겐 좀처럼 없던 일이다. 시간을 재며 사는 게 습관 돼서 그럴까. 책을 빌리면 얼른 집으로 향하곤 했다. 서재에서 또는 거실에서 책을 읽었다. 전화를 받고 메일 확인도 하며 문자 메시지도 읽었다. 멀티태스킹이 되어야 하루 일정 소화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착오가 나도 났다. 바쁜 게 일상이었고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도서관에서 책 읽기를 하지 못했던 이유다. 


집에서 걸어 15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 산수유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로를 따라 걷는 여인이 보였다. 나지막한 산에 나 있는 길. 그녀는 산으로 오르고 나는 도서관 향하는 길을 걸었다. 강아지 꼬리가 희끄무레 보일 때까지 산길로 눈길이 갔다. 산책을 할까, 도서관에 갈까, 잠시 갈등이 일었기 때문이다. 걷기 유혹을 떨치고 예정한 대로 도서관으로 가리라. 삶은 언제나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듯하다. 


작은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조용하다. 몇몇 이용객들이 눈에 띄었고 비교적 한산했다. 평일 오후,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 세상에 재밌고 즐거운 볼거리가 많으련만. 귀하다. 먼저 내 저서를 검색했다. 없다, 한 권도. 최근에 생긴 작은 도서관이어서 그럴까. 내 이름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그럴까.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서가로 가서 책을 살펴보았다. 제목이 기발해 눈길이 가 뽑았다. 머리글을 보고 다시 꽂았다. 다시 또 뽑았다가 꽂기를 몇 차례, 드디어 구미가 당기는 산문집을 꺼내 자리에 앉았다. 


탁자와 의자가 다양하다. 취향대로 앉아 독서할 수 있다. 노트북으로 무언가 쓰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눈을 감고 있는 사람, 사람도 다양하다. 그렇다, 다양성. 요즘 세상을 이해하려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모두 여유로워 보인다. 무언가 쓰고 있는 사람마저도. 조용한 분위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도 그렇게 느낄지 모른다. 사실, 마음은 한유하지 못했다. 다음날까지 읽어야 할 책이 있어 도서관을 찾았기 때문이다.


내일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여유를 가져보리라. 도서관의 분위기가 그렇게 이끌었다. 다음날 읽을 책은 대출하여 밤에 집에서 읽으리라 마음먹었다. 이용객의 출입이 잦지 않은 구석자리 조용한 곳에 앉았다. 큰 글자 산문집 두 권을 뽑아 가지고. 문장이 간결하고 내용이 담백했다. 그 안에 깊은 사유가 들어 있어 공감하며 읽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도서관 안을 둘러보았다. 일종의 눈 운동. 다시 또 독서삼매. 반복. 


두 권을 다 읽고 났을 때, 밖은 어두워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대출했다. 눈에 띄는 게시 글이 있었다. 재능 나눔. 마을 주민을 위한 강연 내지 기부다. 내가 할 만한 것도 있을 것 같았다. 담당 사서에게 생각을 말했다. 사서는 반가워하며 주제를 생각해서 연락해 달란다. 한 번쯤 해볼 만하다. 이제 나눠야 할 때이기도 하니까. 강요하지 않아서 마음이 끌렸다. 억지로 하는 건 진정한 나눔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어야 즐겁지 않을까 싶다. 


한 가지 결심했다. 한 달에 몇 번이라도 도서관에서 독서하기로. 집에서 하는 것과 다른 몇 가지를 누려보리라. 여유, 집중, 평온 같은. 확실히 그랬다. 여유로웠고, 집중했으며, 마음이 평온했다. 집에서는 분주했고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제 내일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오롯이 나를 위해 책 읽는 시간을 가져보리라. 연구나 수업을 위한 책이 아니라, 가볍고 따뜻하며 재밌는 책을 읽으리라. 긴장해서 경직된 몸과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집으로 돌아올 때 산수유 빨간 열매를 다시 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비쳐 더 아름답게 빛났다. 하도 예뻐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차가운 밤바람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유롭게 책을 읽어서 그럴까.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도 유난히 고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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