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만원만 입금해 주세요.”
그가 말했다.
“…….”
“강의 후 저녁 먹으려고요. 오늘은 도시락 안 갖고 갈 겁니다. 동료 선생님이 같이 밥 먹자고 했는데, 더치 할 수도 있어서요.”
“알았어.”
내 대답은 언제나처럼 짧다.
벌써 몇 달이 되었다. 그가 내게 신용카드를 맡긴 지. 아들은 현재 내게 신용카드를 맡기고 체크카드만 쓴다. 어느 날 보니 통장은 비었고, 카드 대금만 쌓인 것을 보고 덜컥 겁이 났다나 뭐라나.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지출이라는 걸 이제야 알다니, 늦돼도 참 늦되는 그다. 더 늦기 전에 알고 자발적으로 신용카드를 맡겼으니 잘했다고 해야 할지, 모자란다고 해야 할지. 아들인데 모자란다는 표현은 쓰지 말자. 진실로 그렇게 인정해 버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후 수입이 들어오면 단돈 얼마라도 모두 내 통장에 입금한다. 그 관리를 내가 맡은 지 벌써 몇 달. 만원만 주세요. 이만삼천오백 원만 주세요. 단돈 몇 백 원까지 정확하게 말하는 예술가 우리 아들이다. 그 모습이 때론 안쓰러워 보이고 때론 결심이 대단하구나 싶기도 하다. 대신 나는 어디에 쓸 건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입금해 준다. 그럼에도 그는 꼭 말한다. 어디에 얼마를 쓸 건지.
시작이 반이라더니 몇 달 지나니 내게 융통해 간 걸 많이 갚았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이고, 안 써야 돈은 모은다는 말이 맞다. 당연한 거다. 그렇게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테지만 잘 지키고 있다. 결심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작심삼일이란 말도 있잖은가. 처음엔 지켜도 며칠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기 십상이다. 쓸 일이나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많을 거라고 본다. 그래도 잘 지키고 있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서 마음을 지키라는 말도 있잖은가.
그렇게 마음을 잘 지켜 성공하고 있는 게 또 하나 있다. 체중감량이다. 집에 들어와 함께 살기 시작할 때, 예술가의 체중은 97kg이 약간 넘었다. 오늘로 꼭 5개월, 현재 77kg이 약간 넘는다. 꼭 20kg을 감량했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럴 리가. 야식을 전혀 먹지 않았고, 사람을 만나도 바깥 음식을 자제했다니, 힘들지 않았겠는가. 거기다 매일 만보 가까이 걸었단다.
집으로 들어올 때 말했다. 반년 만에 20kg을 감량해 주겠다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그는 두말도 않고 응했다. 나는 조련사가 된 듯했다. 먹고 자고 운동하고 일하는 것 모두 통제했다. 아들은 잘 따라주었다. 아침저녁으로 혈압을 쟀고 혈당을 쟀으며 체중계에 올랐다. 두 달 만에 혈압은 정상, 혈당은 석 달이 되어서야 정상이 되었다. 90kg이 되었을 때, 둘이 얼싸안았고, 80kg이 되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77kg대로 내려가니 모든 것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70kg 대가 깨지면 치킨을 한 마리 먹잔다. 지금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안 된단다. 솔직히 치킨 못 먹는 거 빼곤 감량이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집밥, 운동, 규칙적인 생활, 충분한 수면만 지키면 된다고. 까끌거리는 현미밥을 싫다 하지 않고, 튀기거나 볶은 음식보다 찌거나 삶은 음식을 해줘도 마다하지 않고, 하루 만보 걷기를 지키고, 자기 일을 성실히 하는 예술가 내 아들. 함께 지내보니 이런 정도면 결혼해도 뉘 집 딸 고생을 시키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시작은 힘들다. 집으로 들어올 때 망설임이 많았다는 아들. 그건 자유롭지 않을 것 같아 그랬다고. 함께 살아보니 가족은 역시 모여 사는 게 좋다는 결론이란다. 요즘엔 큰 집을 마련해 온이네까지 모두 다 같이 살면 더 좋겠다고 하니, 그 마음만은 알겠다. 가능성은 없는 일일 테지만. 또 몸 관리 잘해 체중감량에 성공했으니 더없이 행복하다고 한다. 거기다 물질적인 부담에서 벗어난 것 또한.
이제 응원하련다. 아들에게 지옥 근처라고 한 말도 취소하고, 함께 있어서 나도 행복하다고 말해주리라. 앞으로 아들의 행보에 손뼉 치며 응원만 하리라. 그동안 속상하고 답답했던 것들 모두 잊고. 어미의 역할은 역시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는 것 같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래야 한다.
예술가의 계좌로 만원을 보냈다. 금세 문자가 왔다. 엄마, 감사해요,라고. 자기 것 자기가 가져가는 건데, 감사할 일이 있을까. 그래도 감사하단다. 그러면 되었다. 작은 것에도 서로 고마워하고, 아껴주고, 인정하는 것처럼 소중한 게 또 있을까. 전화를 걸었다. 오늘도 행복하게 일하라고 말하자 아들이 웃었다. 저녁에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아들과 동거 시작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시작은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무엇이든 시작하는 것에 망설이지 말자. 나쁜 일만 아니면 뭐든 시작하자. 글쓰기도 다시 시작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