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들의 ‘원칙’은 나를 헷갈리게 한다

by 최명숙

아들이 말했다. 방한용 귀마개가 필요하다고. 저녁에 귀가 빨개져서 들어오곤 했다. 코트에 붙은 모자를 쓰라고 하니 질겁했다. 스타일 구겨서 안 될 일이라고.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추운데 무슨 스타일이냐고 소리쳤다. 본인만의 ‘원칙’이란다. 옷에 달린 모자는 쓰지 않는 게. 그럼 뭐 하러 모자 달린 옷을 샀느냐고 했더니, 그 옷의 스타일에 모자 달린 게 어울려서 샀을 뿐이라는 거다. 참나, 별 원칙이 다 있고, 스타일 어지간히 찾는다며, 구시렁댔다.


내 생각에는 모자를 쓰는 게 낫지, 귀마개 하는 건 이상할 것 같았다. 가끔 산책길에 귀마개를 한 남자 산책자를 본 적 있다. 그건 운동하는 거니까 그렇지, 버스나 지하철에서 귀마개 한 사람을 본 적 없다. 까다롭게 원칙 찾는 아들인데 그걸 할까 싶기도 했다. 추위를 유난히 타니까 할지도 모르고, 사달라고 했으니 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내 생각대로 할 필요 없다. 하나 사주리라 마음먹었다.


오후에 산책하는데 추웠다. 바람이 어찌나 매서운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갑자기 아들이 말했던 방한용 귀마개 생각이 났다. 집 근처 생활용품 매장에 들렀다. 적게는 500원부터 몇 천 원이면 웬만한 물품은 다 살 수 있는 곳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리도 싼 물품들이 넘쳐나는지 가끔 의아했다. 또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듯 꼭 필요한 생활용품이 고루 갖추어진 걸 보고 놀라곤 했다. 들르면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구경하다 내가 산 거라곤 포장지 파리채 청소걸레 충전기가 고작이지만.


아무리 필요한 게 다 갖춰진 곳이라도 해도, 설마 귀마개까지 있으랴. 있었다. 그것도 색깔과 모양이 다른 여러 종류가. 가격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모두 천 원이다. 만원인데 동그라미 하나를 잘못 보았나 싶어서 다시 살폈다. 맞다, 천 원. 이럴 수가. 아들이 원했던 게 이걸까. 아닐 거야. 설마 천 원짜리 귀마개를 원했으려고.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을 이런 때 쓰는 걸까. 마음에 안 들어봤자 천 원이다. 안 쓰면 내가 산책할 때 쓰리라. 샀다. 군청색으로.


저녁에 귀가한 아들에게 방한용 귀마개를 건넸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아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색깔도 마음에 든다며, 해보고 더 만족스러워했다. “우와! 아주 따뜻해요. 이제 추위 걱정 없겠는데요.” 입이 함박 만해졌다.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나. 어이없다. 마흔두 살짜리 남자가 천 원짜리 방한용 귀마개를 보고 이토록 천진한 표정으로 만족해하다니. 가격이 얼만지 아느냐는 내 말에, 아들이 궁금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천 원!” 아들은 싸고 좋다며 입이 더 벌어졌다.


소품은 싸고 좋은 걸 쓰는 게 자기 ‘원칙’이란다. 신발과 옷 그리고 가방은 유명메이커를 입고 갖는 게 ‘원칙’이고. 그래서일까, 옷과 신발 가방이 썩 많진 않은데, 모두 괜찮은 것들이다. 얼마나 쓸고 털고 관리하는지 눈꼴이 실 정도다. 신발도 하나만 신지 않고 서너 개를 돌아가며 신고 관리한다. 그래야 오래 신는다나. 옷도 입고 나면 꼭 털어서 옷걸이에 잘 걸어둔다. 가방도 마찬가지다. 관리야 그렇다 해도, 자기만의 원칙이 있다는 건 우습다. 별 원칙이 다 있다며 빈정댔다.


얼마 전 온이가 크리스마스에 놀러 오라고 초청했다. 무슨 선물이 좋으냐고 했더니, 대뜸 ‘헬로카봇 귀마개’란다. 인터넷을 뒤져서 주문했고, 지금 집에 배달돼 있다. 온이와 또온이 것 두 개. 똑같은 것으로. 다른 것을 사주면 서로 다툴 수 있기 때문에 쌍둥이처럼 같은 것으로 했다. 영상으로 보여줬더니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이게 맞는다며. 유치원에서 친구가 사서 쓰고 온 걸 봤단다. 하나에 16,900원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치곤 아주 저렴하게 들었다. 두 개라고 해봐야 33,800원밖에 안 들었으니. 그거에 비하면 아들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은 저렴해도 너무 저렴하다. 그래도 본인이 만족하는데 어쩌랴.


오늘 아침, 아들은 멋지게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신발을 신었다. 화룡점정으로 방한용 귀마개까지. 아주 따뜻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에게 겨우 천 원짜리 귀마개가 그렇게 만족스럽냐고 물었다. “그럼요, 가격이 무슨 상관이에요. 제게 딱 맞으면 좋은 거죠. 하하.” 헷갈린다. 그럼 옷과 가방과 신발은 왜 유명메이커 것을 선호하는지. 그것도 이것도 다 자기 ‘원칙’이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작은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