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숙 Dec 11. 2023

산은 아름답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오랜만이다. 매일 걸으면서도 산으로 온 것은. 단풍이 한창일 때 가본 게 마지막이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온 힘을 다 빼고 싶었다. 가끔 그렇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요즘 마음 복잡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참자니 속이 불편하고 말하자니 품위가 손상되는 듯하다. 이상한 일이다. 할 말을 해보는 게 그렇게 저어 되는 것일까. 참으며 살아온 게 습관 되어 내색하는 게 망설여진다. 


어느 문화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처음 그 강좌를 개설한 사람은 나다. 첫 학기엔 수강생 모집이 안 돼 폐강되었고, 다음 학기엔 강좌 명을 수정하고 강의계획을 다시 짠 덕분에 간신히 개강이 되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강의준비는 물론 창작한 글에 꼼꼼한 논평과 첨삭까지. 수강생들의 호응이 높아졌고 다음부터 한두 시간이면 강좌 신청이 마감되곤 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수강생들 모두 친밀감과 문학에 대한 열정이 생겨 문학기행도 갔고, 창작의욕이 불타올랐다. 수필가와 시인을 꿈꾸고 소설가를 목표로 하는 수강생도 생겼다. 


그런데 그 강좌를 내년부터 다른 강사가 맡고 나는 또 다른 강좌를 진행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이 혼란스러워했고, 나 역시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키워온 강좌던가. 내가 진행하게 된 강좌는 대부분 수강생들의 관심분야가 아니다. 끝까지 가자며 동아리 성격의 모임을 만들었는데. 물론 내가 진행하게 된 강좌 명을 약간 바꾸고, 강의 주제를 바꾸어, 기존 수강생들을 지도하면 된다. 문제는 그게 내 의지대로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거다. 월요일엔 기필코 담당자에게 그 제의를 해봐야 한다. 


기존의 강좌와 새로 개설한 강좌의 성격은 무척 다르다. 두 강좌를 계획한 사람은 나였는데, 기존 것을 다른 강사에게 배정하고 내게는 새로 개설한 강좌를 배정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존 강좌만 계획하고 신청했어야 하는데, 의욕이 넘친 나를 탓해야 하는 걸까. 휴일이라 담당자와 연락해서 조율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다.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을까, 또 조율이 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참으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다. 내가 키워온 강좌라 해서 오롯이 내 것일 수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강생들이 키워온 강좌다. 그들의 관심이 더 컸다. 언젠가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일이 생겼었다. 그때는 수강생들이 담당기관에 숱하게 건의하고 호소해서 팔 년 가까이 내가 담당하고 있다. 지금은 작가로 등단한 제자들이 몇 생겼다. 글쓰기는 꾸준히 오래 성실하게 해야 한다. 또 지도하는 사람과 유대도 중요하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난한 길이 작가의 길이다. 


그 복잡한 마음을 해소하려면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워야 한다. 산에 오르는 일처럼 적당한 게 또 있을까. 나에겐 그렇다.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요동 없는 묵직함으로. 저리도 깊은 모습으로 있다니. 이렇게 저렇게 휘둘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세상일이라는 게 모두 만만치 않지만 그렇다고 사소한 것 중에 안 되는 게 어디 그리 있던가. 말하기 싫고 남에게 부탁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더 많지 않던가. 


산에 오르며 결심했다. 월요일에 담당자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보리라고. 산은 벌거벗고 있었다. 나뭇잎이 다 져버렸기 때문에 산마저 벌거벗은 듯 보였다. 갈잎, 솔잎, 후박나무 잎이 떨어져 온 산길을 뒤덮었다. 솔직하고 당당하며 너그러운 산. ‘아름답다.’ 산이 주는 교훈이다. 거리끼지 말자, 마음을 비우자, 솔직하게 제의해보자. 등에서 땀이 났다. 촉촉이 배어 나오는 땀에 불편한 마음도 배어 나왔다. 다 괜찮다. 이래도 저래도. 마인드 컨트롤.


겉으로 보기와 달리 나는 소심한 편이다. 그래서 실수가 적을 수 있다. 겉만 보면 장군 포스가 난다나. 최 장군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내가, 이 정도 일로 고심할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하랴. 사람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면이 있는 모양이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쓸데없는 고민을 할 때 자주 있다. 사람이 하는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도 저래도 고민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겨울나무는, 산은, 아름답다. 앙상한 가지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를 향한 위무의 손짓 같았다.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남은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욕심을 버린 것 같아서다. 내가 고심하는 것의 바탕에는 사욕이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사심 없는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리라. 그래야 마음도 몸도 맑은 사람이 되리라. 아름다움은 그 맑음에서 발현될 테니까. 산에 오르고 내리며 겨울나무에게 아름다움을 배운다. 산에서 내려올 때, 지끈거리는 두통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후일담. 월요일 오전에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걱정과 달리 담당자는 흔쾌히 강의 명을 수정해도 좋단다. 그야말로 쓸데없이 걱정한 격이다. 진정한 문학교실로 탄생하여 한 단계 높은 강의를 진행할 것 같아 설렌다. 두통은 말끔히 사라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결혼식장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