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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Dec 14. 2023

생애 최초의 크리스마스 선물

 

설마, 그냥 하는 말이겠지. 생애 최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고 했더니 주위의 반응이다. 사실이다. 엊그제 난 생애 최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이 나이에 처음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이게 뭔가 싶다. 그 흔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처음 받았다는 게. 별 생각조차 없었다. 남에겐 선물을 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인간성을 의심하지 마시길.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크리스마스 선물에 의미를 두지 않아서 그렇지, 과거에 받은 적 있을지도 모르니까. 


잠시, 내가 잘못 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다는 게 최종 결론이다. 이웃이 잘못되길 바란 적 없고, 이웃이 슬픈 일 당했을 적엔 진심으로 슬퍼해줬으며, 도울 일 있으면 외면하지 않았다. 적어도 인색하지 않은 편이었다. 인심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으므로. 심지어 전화 인심까지 좋다고. 요즘엔 전화를 하고 사는 문화가 아니고 문자를 주로 하기 때문에 그 부분은 달라졌지만. 


엊그제 일이다. 우리 애들의 유치원 때 원장이 우리 집 근처라며 전화했다. 두말 않고 얼른 뛰어나갔다. 애들이 유치원 다닐 때 만났으니 35년이 넘는 인연이다. 언제든 어디서는 여건만 되면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애들 둘 다 그 원장이 운영하는 유아교육기관에 다녔다. 우리는 만나도 첫 대화가 아이들 이야기다. 그녀는 자라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사는 게 기특한가 보다. 두 아이의 근황을 들으며 만면에 웃음을 띤다. 따뜻하기 그지없는 그녀. 


우리는 헌인릉 산책을 했다. 팔짱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헌인릉은 한산했다. 그녀는 갑자기 시간이 나서 오게 되었단다. 가까이 살지만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지 못했다. 지난번 아들 전시회 때 만나고 처음이다. 아들의 결혼 걱정을 진심 담아하면서도, 어릴 적부터 똑똑하고 성품이 좋은 사람이니 걱정하지 말란다. 꼭 좋은 사람 만날 거라고. 딸이 잘살고 있는 게 또 그렇게 대견한가 보다. 온이들 이야기를 묻고 또 물었다. 


오리나무가 잎사귀를 더 떨어뜨린 채 꿋꿋하게 서 있다. 생강나무 군락지를 지나며 봄에 다시 오자고 했다.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려주는 생강꽃을 보자며. 태종과 원경왕후의 릉을 올려다보며, 무상한 인생을 생각했다. 순조와 순원왕후 김 씨의 릉 옆을 지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한 바퀴 돌고 반 바퀴 더 돌았으니까. 조만간 다시 또 만나자고 했다. 그녀가 다음 일정이 있어 그만큼만 함께한 시간이었다. 


주차장에서 그녀가 차문을 열더니 내게 작은 손가방을 건넸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산책할 때 쓰세요.” 그녀가 말했다. 잿빛 털모자였다. 그 안에 보드라운 질감의 팥죽색 장갑도 들어 있었다. “어머! 제 생애 첫 크리스마스 선물인걸요.” 나도 모르게 새된 목소리가 나왔다. 그만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자주 선물을 주고받았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이름으론 처음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렇다. 


집으로 와서 모자를 써보았다. 어쩜, 잘 어울린다. 따뜻하다. 그녀의 마음처럼. 장갑도 포근하다. 역시. “아유, 싼 거예요. 막 쓰세요. 아끼지 마시고요.” 그녀는 고마워하는 내게 말했다. 나는 아낄 것 같다. 나를 생각하며 고르고 사서 갖고 온 그 마음을 잊지 못할 거다. 오래오래.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게 선물이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걸 알고서야 어찌 아끼지 않으랴. 


저녁에 아들에게 말했다. 환한 얼굴로 얼른 모자를 쓴다. 어울린다. 벗어서 내게 씌워주더니 귀엽게 잘 어울린단다. 이 나이에 귀엽다는 말을 듣다니, 이래저래 특별한 날이다. 장갑까지 보여주며, 내 생애 최초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다. 아들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정말이냐며. 그렇다고 하자, 나를 안아주었다. 이제부터 선물 자주 하겠단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 꼭 그렇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다 보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으니까. 


아들에게 물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은 게 뭐냐고. 아들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꼭 사고 싶은 부츠가 있다고.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무척 고가여서. 아들도 말해놓고 민망한 마음이 들었는지 낄낄 웃었다. 그 속을 모르는 바 아니다. 물었으니 사주리라. 내일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 사줘야 하리라. 사줄 테니, 주문하라고 했다. 아들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정해졌고, 아들 마음은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 생애 최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후한 마음이 생겼나 보다. 결정되면 말하라고 하니, 아들이 빙긋 웃는다.


낮에 온이가 전화해서 크리스마스에 초대한다고 했다. 맛있는 것 많이 해놓고 파티하잔다. 올 크리스마스는 이래저래 더 풍성할 것 같다. 온이와 또온이에게 무슨 선물을 할까. 딸과 사위에게도.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행복한 성탄절이 되기를 바라면서. 생애 최초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내게 넉넉한 마음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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