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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Oct 06. 2022

성적평가와 강의평가

평가 전성시대

    

성적평가는 늘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선생 노릇을 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여기엔 해당되지 않는다. 그건 더 가혹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점수로 평가한다는 게 비인간적으로 생각될 때 많았다. 애정을 갖고 가르친 학생들을 어떻게 성적으로 평가한단 말인가. 앞으로 더 잘하라는 격려가 아닌, 넌 이만큼 했다는 평가를. 


개강하는 날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성적 평가 배점을 공지한다. 출석 20%, 리포트 20%, 중간과 기말고사 각각 30%다. 강좌의 특성에 따라 교수 재량껏 조금씩 달리할 수 있으나 대개 이와 같다. 학생들은 이때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성적을 공시해야 관심을 갖는다. 기말고사 전 주에 다시 한번 공지한다. 세부적으로. 지각 세 번이면 결석 1회로 간주한다든지, 리포트 제출 날짜에서 하루 늦을 때마다 1점씩 감점한다든지.


점수 배점을 세밀하게 공지하는 것은 성적평가에 대한 부담을 줄이려는 나의 의도가 다분하다. 또 공정하게 하고자 하는 것도. 그렇다고 공정할 수 있을까. 아니다. 솔직히 공정하려 노력했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자신 없다. 주관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국문학과 특성상 시험도 객관식인 게 거의 없다. 주관식이다. 무엇과 무엇에 대한 견해를 논해라. 분석하고 비교하라 식의 문제이다. 그러니 지극히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 쉽지 않다. 


그것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오글거리는 지엽적인 문제를 몇 개 내기도 한다. 용어 해설, OX문제, 단답형 등 똑 떨어지는 문제다. 말 그대로 유치하고 치사한 문제다. 수강학생 수가 많거나 상대평가인 경우, 대학 선생으로서의 체면불고 하고 내는 문제들이다. 그것도 아주 머리를 써야 한다. 깊이 세밀하게 공부한 학생만이 정답을 맞힐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 공부한 학생을 변별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학생들을 한 줄로 죽 세운다. 그리고 정해진 퍼센트에 따라 끊는다. 웬만해서 F를 주지 않는다. 공부를 많이 시키고 F를 주지 않는 게, 성적평가에 대한 내 소신이다. 절대평가인 경우 그나마 여유가 있어서 마음 편하다. A+에 편중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유의사항이 있지만 교수 재량이니까. 언제가, 4학년 대상 강좌를 맡았을 때다. 전공과목이고 학생 수가 적었다. 거의 A+ 또는 A를 주었다. 성적을 부풀리지는 않았다. 모두 열심히 했고, 취업을 코앞에 둔 제자들인데, 잘 주고 싶은 게 선생의 마음이었다. 다행히 아무 문제없이 넘어갔다. 


난감한 일도 비일비재하다. 기말고사를 안 보고 연락이 안 되어 성적을 줄 수 없는 경우다. 지금까지 잘해놓고 왜 기말고사를 안 봤을까. 궁금해서 전화나 메일로 연락하거나 옆에 앉았던 학생에게 물어봐도 연락이 닿지 않을 때, 선생인 내가 더 애탄다. 장학금을 못 받으면 학교에 더 이상 다닐 수 없으니 성적을 올려 달라고 사정하는 학생도 있다. 물론 성적을 올려주지 못한다. 상대평가는 누굴 올려주면 누구를 대신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여러 경우가 있다.


외면으로 선생과 학생 관계지만 내면으로 교수자와 학습자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관계를, 나는 탈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스템은 나의 바람을 언제나 무시한다. 선생은 학생을 ‘성적’으로 평가하고, 학생은 선생을 ‘강의평가’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학생에게 한 성적평가는 평생 붙어 다닌다. 선생에게 한 강의평가는 인사고과에 반영되고, 시간 강의를 하는 사람에게는 다음 학기 강의 배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건 지극히 사무적인 관계라고밖에 볼 수 없다. 어찌해 볼 수 없는. 


학생은 성적으로 상처받을 수 있듯이, 선생은 강의평가로 상처받을 수 있다. 심지어 강의 평가에는 주관식으로 쓰는 항목이 있어, 솔직함을 가장해 악의적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교수 중에는 상처받아 강의에 의욕을 잃고 학생들 대하기 힘들다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는데, 나는 강의평가를 웬만해서 조회하지 않았다. 점수로 내가 평가되는 게 싫었고, 주관식 답변을 읽으며 혹시 받을 상처를 저어해서다. 익명으로 쓰여 있지만 글의 내용을 보면 누군지 짐작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용감하지 않은 교수였다. 인정한다. 


강의 평가 항목을 보면, 불합리한 것도 많다. 대부분 학생 입장을 더 고려한 질문들이다. 거기서부터 공정하지 않다. 물론 강의평가 취지는 긍정적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강의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강의 질을 높일 수 있으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교수자와 학습자의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더 나은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 


성적을 내서 공시한 다음 성적 이의 신청 기간이 끝날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다. 이의 신청을 하는 것부터 선생에 대한 불신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애써 그 감정을 털어내려고 해도 인간의 한계인지, 힘들다. 더구나 공정하게 하면서 전체적으로 후하게 성적을 준 경우, 그것을 몰라주고 더 올려달라고 할 때, 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그래도 참고 설명해줘야 한다. 물론, 학생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니다. 그럴 수 있다고도 본다. 그러나 마음이 힘든 건 사실이다. 


장황하게 이메일로 성적 이의 신청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내용은 천편일률적이다. 한 학기 동안 유익한 강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시작되어, 어디가 부족한지 설명해주시면 다음 학기에는 보완해서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결국 내가 준 성적에 불만이 있다는 거다. 그러면 나는 전화를 걸어 설명해준다. 이메일로 설명하는 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 사무적이고 건조해서 말이다. 전화는 그나마 목소리를 통해 피드백이 바로 오니까 낫다. 학생들 대부분 수긍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면 끓어오르던 마음이 슬며시 가라앉는다. 방학 잘 보내고 개강하면 보자는 말로 마무리한다. 그게 힘들어 성적 올려놓고 외국여행을 가장하는 교수들이 심심찮게 있다는 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만큼 힘들다는 걸 방증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학교에서 퇴임한 지금 성적 평가에서 놓여났다. 그리고 강의평가에서도 웬만큼 자유로워졌다. 웬만큼? 그건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이나 문화센터에서도 강의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론 강해 보여도 속으론 연약하기 그지없는 나란 걸 다시 확인하며 싱긋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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