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은 힘이 세다

by 최명숙

욕실에 진한 자주색 수건이 걸려 있다. ‘최 ㅇㅇ 선생 팔순 기념’이라는 문구와 날짜가 찍혀 있다. 작은아버지다. 할아버지의 작은댁인 작은할머니의 맏아들. 우리 아버지와 이복형제 사이다. 할아버지는 4대 독자였다. 집안이 번족하지 못해 어른들은 늘 걱정이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 때문이라 해도 핑계에 불과했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작은댁을 얻어, 본댁인 우리 할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쳤다. 그래도 할머니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다행히 작은할머니의 아들들과 할머니의 아들들은 이복형제인데도 우애가 좋았다. 남들이 볼 때 이복형제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위계질서가 있었고, 할머니들에게 모두 어머니로 대했다. 그 작은아버지들의 자식인 사촌들과 우리도 비교적 우애 있게 지낸다. 윗대에서 그랬으므로 자연히 우리도 그렇게 된 것 같다. 할머니들도 다투지 않았으며 관계가 나쁘지도 않았다. 아마도 모든 걸 서로 팔자소관으로 돌린 게 아닌가 싶다.


수건은 작은아버지 팔순잔치에 갔다가 받아왔다. 팔순잔치 후 3년 정도 더 사시고 세상을 떠난 작은아버지. 벌써 7년이 넘었다. 그렇다면 저 수건은 10년째 욕실 수건걸이에 걸린 셈이다. 물론 아주 가끔 걸린다. 수건이 수십 장 되어 돌아가면서 쓰니까, 그렇듯 오래 사용하는 것이리라. 아직 더 써도 될 만큼 성하다. 약간 낡긴 했어도 올 하나 흠집이 없다. 적어도 앞으로 3년 이상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수건은 힘이 세다.


그 수건을 쓸 때마다 작은아버지 생각이 난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동네 위에 살았다. 평생 벌목 사업을 했는데, 일 보러 읍에 나갈 때마다 자전거를 우리 집 헛간에 세워놓고 갔다. 그 자전거로 일찍이 타는 걸 익혔다. 중학교 때였다. 자전거 타기가 체육과목 방학숙제이기도 했다. 그래도 남학생들은 자전거를 타도 여학생들은 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오죽하면 방학숙제로 내줬을까. 그 자전거로 운전을 익혔고 신나게 타고 다녔다. 어느 때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다 무릎을 다친 적도 있다. 그건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내가 자동차 운전을 비교적 일찍 배운 게 자전거 때문인지 모른다. 기계 다루는 걸 겁내지 않고 오히려 재미를 느꼈으니까. 오토바이도 배우고 싶었는데, 남편이 말리는 바람에 배우지 않았다. 나중에 오토바이 사고가 나는 걸 보고 안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는 대형차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그게 조금만 더 깊어지면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게 내 성격인데, 다행히 관심 정도에서 멈추었다. 모두 어릴 적에 또래보다 자전거를 빨리 배운 게 작용했을지 모른다. 기계에 대한 호기심 말이다.


작은아버지가 세상에 안 계신데, 팔순 기념 수건은 남아 있다. 십 년 동안 썼는데 아직도 성하게. 안 쓰고 아낀 것도 아닌데. 그러니 힘이 세지 뭔가. 이제 색깔이 좀 변하긴 했다. 자주색이지만 선명한 색깔이 아니다. 그저 불그죽죽하게 보이는 색깔이다. 작은아버지 팔순잔치에 많은 친지들이 모였다. 그날의 풍경은 생각만 해도 고스란히 떠오른다. 흥성거렸고, 즐거웠다. 그건 작은아버지 생애 마지막 잔치였다. 잔치 후 얼마 되지 않아 암이 발견되었고 3년 정도 투병하다 돌아가셨다.


수건은 저렇게 걸려 있는데, 사람은 가고 없다. 그래서 수건은 힘이 세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나를 볼 때마다 기꺼운 마음을 표현하곤 했던 작은아버지. 우리 집안에 너 같은 사람이 날 줄 몰랐다며, 사내가 아닌 것을 아쉬워했다. 그런 의식을 가진 게 어쩌면 자연스러워 그 말에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어찌나 자주 했는지 그 말에 섭섭하다고 했더니, 그 후론 다시 하지 않으셨다. 친정에 가면 꼭 찾아가 뵈었는데, 그때마다 함함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수건을 다시 본다. 날짜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데, 우리 작은아버지는 이렇게 팔순 기념 수건을 남겼다. 그뿐 아니다. 나를 기꺼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따뜻한 눈길도 남겼다. 수건은 힘이 세다. 그 내포된 의미가 세다. 그립다, 오늘. 작은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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