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눈은 낭만적이다. 펄펄 내리는 모양도 그렇지만 흰색이 주는 순수함이. 그래서일까. 흰 눈을 보노라면 그때가 떠오른다. 지난번 공원에서 중학생 남녀 학생들과 눈사람을 만들면서도 그날이 생각났다. 친구들도. 솜털 보송보송한 그 아이들처럼, 맑게 티 없이 웃던 아이들처럼, 내 친구들도 그랬다.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밤새 눈이 내려 정강이까지 푹푹 빠졌다. 나는 집에서 30리가 족히 되는 학교로 통학을 했다. 버스는 남녀 중고생들로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날은 꼭 타야 하는 버스를 놓쳤다. 사십 분마다 한 대씩 오는 다음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지각이다. 그날 내가 탄 버스도 이상하게 만원이었다.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정류장으로 오느라, 버스를 놓쳤던 게 아닐까.
정직하고 준법정신이 강했던 나는 여간 조바심 나는 게 아니었다. 정류장에서 내려 학교까지 이십여 분 정도 걸리는 거리. 뛰어 가도 십분. 아무리 생각해도 이십 분 정도 지각이다. 지각 결석이 전혀 없었는데, 눈 때문에 지각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눈이 야속하기만 했다. 뿌루퉁한 마음을 안고 뛰다시피 학교로 향했다. 다 닳은 운동화 바닥 때문에 길은 미끄러웠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지각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달렸다. 쌓였던 눈이 바람에 날려 내 얼굴로 달려들었다. 꼭 싸라기눈 같았다.
학교 앞과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 시절엔 눈이 오면 학생들이 눈을 치웠다. 학생들 표정이 밝다. 눈을 던지고 도망치고 장난하며 노동이 아니라 놀이처럼 즐기는 모습이었다. 은주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직 출석 안 불렀어.” 그 친구는 내가 준법정신이 강한 고지식한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리라. 또 지각한 걸 얼마나 불편하게 생각하는지도. 마음이 아주 편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안심되었다.
그때 남학생 서너 명이 무리 지어 내게 다가왔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는 당시 우울감이 심했다. 진로와 집안 문제로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지고 있는 아이였다. 거기다 성격도 지극히 내성적이었다. 은주 외의 급우들과 거의 말없이 지냈다. 그런 내게 남학생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다니 의아했다. 예민한 나는 금세 눈치를 챘다. 분명히 무슨 ‘함정’이 있을 거라고. 그만큼 나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있던 때였다.
“너 지각했지? 선생님이 데려오라고 하셨어.” 경석이가 말했다. 조금 전 은주가 출석 부르지 않았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안심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경석이를 째려보았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경계를 풀었다. 그 미소 때문이었다. 그 아이와 같이 온 친구들도 흰 눈처럼 함박웃음을 웃었다. 함정이라고 생각했던 경계심이 스르르 풀렸다.
경계를 풀자, 갑자기 남학생들 둘이 양쪽에서 내 팔짱을 끼었다. 한 아이는 책가방을 낚아채 들었다. “무슨 짓이야!”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남학생들은 모두 히히 웃기만 하고 도와주지 않았다. 은주와 여학생들만 왜 그러느냐고 징징거렸다. 나는 양쪽에서 팔을 잡고 끌고 가는 남자아이들에게 눈만 흘길 뿐이었다. 버둥거려도 소용없다. 그렇게 20미터 정도 끌려갔던 듯하다.
남학생들은 눈 위에 나를 휙 던지듯 떠밀었다. 푸욱 빠져 들어갔다. 남자아이들은 박장대소했다. 눈 속은 아늑했다. 웃는 아이들이 밉지도 않았다. 선생님께 끌고 간 게 아니라 장난이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 와중에도 지각 때문이 아니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못 말리는 강박증. 나도 가만히 웃었다. 내가 웃자 남자아이들은 흥미를 잃은 듯했다. 그때 알았다. 나를 골탕 먹이거나 음해하는 자들에겐 여유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사람뿐 아니다. 닥치는 문제나 상황에도, 여유를 갖고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면, 제풀에 꺾여 물러난다. 더 나쁘지 않은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을 그때 배웠던 걸까. 아무튼 그 비슷한 걸 알았다.
가만히 웃는 나를 보고 전의를 상실한 남학생들. 경석이가 손을 내밀었다. 구덩이가 깊이 파인 그곳에 치운 눈을 붓고 위장해, 함정을 만들었던 거다. 눈으로 덫을 놓다니, 기발하다면 기발하다. 눈으로 만든 함정에서 나오기 쉽지 않았다. 이쪽으로 푹, 저쪽으로 푹, 빠져 들어갔으니까. 몇 명의 남자애들이 달려들어 나를 꺼내주었다. 평소라면 신경질적으로 대응했을지 모른다. 그날은 하얀 눈이 내린 날이었다. 물에 빠뜨린 것 아니고, 불에 던진 것도 아니다. 하얗고 깨끗한 눈 속에 나를 던져 넣은 것이다.
옷에 묻은 눈을 은주가 털어주었다. 우리는 무슨 이야긴지 재잘거리며 교실로 들어갔다. 그날부터 경석이 류의 남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지냈고, 얼마 되지 않아 중학교를 졸업했다. 물론 그날 난 지각으로 표시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등교하자마자 눈을 치우느라 출석을 부르지 않았으니까.
오늘 오후에 눈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들었다. 눈이 내리면 경석에게 전화해 기억나느냐고 물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