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는 두껍게 언 논바닥에서 썰매를 타고 있었지. 거긴 우리만 아는 장소였어. 동악산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다랑이 논이었어. 거길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 그냥 우연이었어. 그때도 난 산책을 좋아했어. 산책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던 시절이었어. 쉽게 말하면 혼자 어슬렁거리며 걷기를 좋아한 거지. 겨울 동악산은 어떨까 궁금했던 것 같아. 그래서 거기까지 갔겠지. 집에서 좀 떨어진 곳이니까.
동네 아이들은 개울에서 썰매를 탔지. 그날도 삼촌이 만들어준 썰매를 들고 동생들과 개울로 갔었어.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꽁꽁 언 개울에서 썰매를 타고 있었어. 그때나 이때나 나는 경쟁하거나 북적거리는 걸 싫어해. 부딪치고 넘어지고 울고. 아이들로 넘쳐나는 그 좁은 개울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 아이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좁게 느낀 거지, 그렇게 좁고 작은 개울은 아니었어. 불현듯 생각이 났어. 며칠 전에 보았던 동악산 가는 길에 있는 다랑이 논이.
두 동생을 데리고 그곳으로 갔지. 그 다랑이 논은 내 예상대로 꽁꽁 얼어 있었어. 드문드문 거뭇거뭇 벼 벤 곳이 얼음 속에 깊이 잠겨 있었고. 겨울비가 올 때 물꼬를 터놓지 않아 그랬을까. 완전히 스케이트장이 된 거야. 동생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지. 얼마나 신나게 썰매를 탔던지. 거긴 우리들의 천국이었어. 우리 삼 남매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 같았으니까. 난 동생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올 때, 내심 걱정했지. 물을 다 빼서 얼음이 얼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고.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해가 설핏 넘어가고, 빨간 노을이 서쪽하늘을 물들이고, 우리의 볼도 노을빛 못지않게 붉어지고, 찬 기운을 느끼고, 어스름이 서서히 내리고, 세상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우리는 썰매를 탔어. 남동생은 진력이 났는지 여동생에게 혼자 타보라고 했지. 어설픈 솜씨로 처음 썰매를 타는 일곱 살짜리 여동생은 징징대다 아홉 살짜리 오빠를 쳐다보곤 했지. 마지못해 남동생은 다시 썰매에 올라서서 앞에다 동생을 앉혔어. 썰매가 하나뿐이어서 나는 썰매를 탄 건 아니었어. 발로 슥슥 미끄럼 탔을 뿐이야. 고무신을 신은 발이 얼마나 시렸는지. 그래도 재밌었어.
우리는 겨울방학 내내 거기서 썰매를 탔어. 꽁꽁 얼었던 얼음이 봄기운에 희치희치해질 때까지. 여동생이 얼음에 발을 디디면 깨질 때까지. 거긴 우리의 천국이었어. 우리만의 놀이터. 아침 먹고 그곳에 가서 놀고, 점심 먹고 와서 다시 놀았어. 동네 아이들이 왜 개울에서 놀지 않느냐고 물어도 우린 말하지 않았어. 내가 동생들에게 입단속 시켰거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때 동생들은 내 말을 잘 들었어. 둘 다 고개를 깊이 끄덕였고, 아무도 발설하지 않았어.
내가 그곳을 좋아한 것은 우리만의 썰매장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 그 동악산자락에 아버지가 누워 계셨거든. 난 썰매를 타다가 슬쩍슬쩍 곁눈질하며 아버지 산소를 보곤 했어. 이런 생각이 들었지. 우리가 노는 모습을 아버지가 보고 있을까 하는. 이상한 일이었어. 열한 살짜리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이. 그곳을 좋아했던 게 우리만 놀기 좋은 곳이어서 아니라 아버지가 그리웠던 것인지도 몰라. 무심코 한 행동의 저변엔 꼭 원인이 있는 거잖아. 하다못해 잠재의식 속에 있던 것이라도.
동생들에겐 말하지 않았어. 가만 눈물이 나기도 했지. 동생들이 볼까 봐 얼른 소맷자락으로 훔쳤지. 남동생이 썰매에서 내려와 얼음 위에서 팽이를 치면, 내가 여동생을 앞에 앉히고 서서 썰매를 몰았어. 난 서툴러서 몇 번이나 동생과 엎어지곤 했어. 그걸 보다 못한 남동생이 툴툴 대며 다시 썰매로 왔어. 그 애는 어릴 적에 툴툴대는 게 특기였던 것 같아. 꼭 투덜이 스머프처럼.
어쨌든 지금 생각하면 그 겨울, 그곳, 우리들의 천국이었어. 가끔 떠오르곤 해. 꽁꽁 언 여동생의 작은 손을 내 입김으로 호호 불며 녹여주던 것. 동생들에게 썰매를 양보하고 난 발로 미끄럼을 탔거든. 한 번도 나도 탈래, 그만 내려, 하는 말을 해본 적 없어. 동생들이 모두 싫증나 썰매에서 내려와야만 내 차례가 되었지. 동생들이 웃고 즐거워하는 장면을 보는 게 내 즐거움이기도 했거든. 겨우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말이야. 기특한 나였어.
그 산자락에 있는 다랑이 논 썰매장에 오는 친구들은 없었어. 겨울이 다 가도록. 우리가 비밀을 철저히 지킨 거지. 아무래도 너무했어. 옆집 상희에게 만이라도 알려줬어야 하는데. 동생들의 입이 무거웠고 나는 그러다 소문이 나면 또 앞개울처럼 아이들이 바글거릴까 봐 그랬던 거야. 동생들에게 실컷 썰매를 타게 해 주려고. 그때 내가 동생들에게 해줄 건 그것밖에 없었거든. 순전히 동생들 때문이야. 내 욕심이 아니고. 이건 처음 밝히는 건데, 동생들은 기억할까 몰라.
올 겨울이 가기 전에 고향에 가볼 예정이야. 동악산자락 다랑이 논도 보려고 해. 이 글을 쓰면서 무척 그리워졌거든. 그리운 것은 마음껏 그리워해야 해. 겨울만 되면 떠오르곤 하던 그 장면을 재현할 수 없지만 추억할 수 있는 거잖아. 아버지 산소는 이장해서 이제 그곳에 없어. 그래도 아버지가 누워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그곳을 곁눈질 않고 쳐다볼래. 동생들 때문에 슬쩍슬쩍 곁눈질했던 그곳을. 철부지 동생들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굳이 일깨워주고 싶지 않았거든.
올 겨울엔 춥지 않을 거래. 아마 다랑이 논은 얼지 않을지 몰라. 혹시 얼었다면 들어가 발 미끄럼이라도 타보려고. 나 혼자 조용히 그리운 시절을 그리워해 보려고. 또 그리운 사람도. 썰매를 만들어준 삼촌, 산자락에서 우리를 지켜본 아버지, 나이 들어가고 있는 동생들, 할머니와 어머니까지.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삼촌은 하늘에서 날 보실까. 올 겨울, 마음도 유난히 따뜻할 것 같아. 가족이 그런 거잖아. 생각만 해도 힘이 나고 따뜻한 그런 존재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