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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Dec 18. 2023

기억상실과 시력저하


한 친구가 말했다. 전화기를 냉장고에서 찾았다고. 그 말에 깔깔거렸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욕실에 들어와 거울을 보며 내가 여긴 왜 들어왔지, 했다며. 누군 차 키를 들고 한 시간 찾았다고도 했다. 업은 아기 삼 년 찾는다는 말이 공연히 있는 게 아니다. 옛날 사람들도 기억상실일 때 자주 있었나 보다. 속담까지 있는 걸 보면.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욕실에서, 왜 들어왔는지 모르겠더라는 친구에게 당장 치매 검사받아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모두 웃자고 한 말이었다. 


실제로 기억상실이 된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다. 어쩌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기도 할까. 그건 드라마나 영화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막상 그런 일이 생기면 혼란스러울 것 같다. 당사자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까지. 그 비슷한 일을 겪어본 나로선 그걸 재미로 받아들일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몰라본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기막힌 현실일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나는 호흡이 있는 그날까지 정신을 꼭 잡고 있자는 주의다. 얼마 전 어머니와 통화 중에 엉뚱한 말씀을 하셔서 깜짝 놀랐다.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 교정했더니, 잠시 기억이 헷갈렸다고 인정하셨다. 다행스러웠다. 깜짝 놀랐다고 했더니 왜 내가 치매일까 봐? 하면서 웃으셨다. 이제 당신의 현실 모습에 여유가 있는 모양이다. 기억이 자꾸 나빠지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볼 때 젊은이 못지않은 기억력이다. 어머니께도 말했다. 정신줄 꼭 잡고 계셔야 한다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탤런트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있다. 이름은 생각나는데 성이. 전에 어느 프로그램에서 안문숙 씨를 보고 ‘문숙’이라는 이름은 알겠는데, 성을 모르겠기에 한참 고심했다. 김문숙 아니고, 강문숙도 아니고, 최문숙 더 아니고, 아무튼 세다는 성인데, 황문숙인가, 그럼 정문숙인가, 다 아니었다. 하, 연기며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내가 좋아하는 탤런트인데, 도대체 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검색. 아하, 안문숙이었다. 


그때 속으로 걱정되었다. 나도 서서히 기억상실이 되고 있나 싶어서. 늙어갈수록 웬만한 것은 좀 잊는 게 좋다는 말도 있다. 내게 속상하게 했던 사람, 가슴 아팠던 일, 용서할 수 없는 사건 등 잊거나 잃어버려도 좋은 것들. 알 수 없는 게 그런 건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꼭 기억해야 할 건 기억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초기에 정보가 바르지 않게 들어오면 교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에서도 바른 정보가 입력되도록 잘 가르쳐야 한다. 


요즘엔 기억뿐 아니라 시력도 저하되는 게 아닐까 싶다. 제자들로 구성된 문학회에서 방학을 맞아 백일백장 쓰기를 하고 있다. 총무가 매일 글감을 올리는데, ‘거울’을 ‘겨울’로 읽고 글을 썼다. 나중에 보니 겨울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이미 글을 써서 올린 지 며칠이 지났고 그러도록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잘못된 것을 알고 내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했다. 기억이야 조금씩 그래도 큰 상관없지만 시력저하는 문제다. 제대로 바로 봐야 하는데, 벌써 그런 오류를 범하다니. 


아주 생판 다른 단어가 아니라, ‘거울’을 ‘겨울’로 읽은 거니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또 계절이 ‘겨울’ 아닌가. 거울보다 거울로 읽기 십상이지 뭐, 스스로 위로한다. 단톡방에 그런 사정을 말했더니, 어떤 제자는 온천에서 ‘안마탕’을 ‘연마탕’으로 읽었다 하고, 또 다른 제자 지인은 천주교 세례명 ‘엠마’를 ‘엄마’로 읽었다는 이야기가 올라왔다. 웃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오독은 웃고 말 일이다. 그것으로 시름에 잠길 필요까지 없다. 


이제 기억상실과 오독으로 인한 해프닝쯤은 웃음으로 넘길 여유가 생겼다. 속으로야 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정확하게 기억해야지, 정확하게 읽어야지, 하는 각성도 생긴다. 그래도 아닌 척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기는 척한다. 나이 든다는 건 어쩌면 ‘척’이 많아지는 것인지 모른다. 그걸 외식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난 교양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파도 아닌 척, 속상해도 아닌 척, 섭섭해도 괜찮은 척, 잊지 않았어도 잊은 척, 그런 것들 말이다. 날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당당하고 멋질 때 있지만 조금은 절제되고 꾸미는 것이 괜찮게 보일 때도 있다. 


기억상실과 시력저하는 나이 들어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최대한 기억과 시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불가항력적인 부분은 속으로 감수하고, 겉으론 덜 보이도록 애쓰련다.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그래도 괜찮다, 다 괜찮다, 스스로 위무하면서. 기억상실까지 아니라도 기억이 쇠퇴하는 것, 시력상실까지 아니라도 시력이 저하되는 것, 지금 이쯤에선 다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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