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잔, 따뜻한 정이 스민 문장이다. “여보게, 이리 와 막걸리 한 잔 하고 가게!” 논두렁에서, 밭두렁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는 소리. 그 소리를 흔하게 들으며 자랐다. 윗마을 건넛마을 사는 농사꾼을 부르는. ‘술 한 잔’이라는 말을 듣고 떠오른 게 바로 그 장면이었다. 이제는 시골이라 해도 흔치 않은 광경일 게다. 대부분 기계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농주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다 저녁에 친구가 전화를 했다. 종일 강의다 회의다 지쳐 돌아와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피로가 쌓여 하루 쉰다는 아들에게 무엇을 좀 해먹일까 고민도 하면서. 친구는 대뜸 나오란다. 술 한 잔 하잔다. “나 술 안 마시는데, 무슨 술 한 잔.” 아들 저녁 걱정이 먼저 들어 한 말이다. 술 한 잔이 꼭 술 한 잔이지 않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이 친구야, 그냥 나와!” 친구가 간곡히 말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같이 다닌 남자동창생, ‘홍’. 어쩌다 우리 집 근처에서 일을 보고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란다. 아들은 아무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바깥은 추웠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술 한 잔 마실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가 번화한 곳이라 주차가 용이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거절하지 못하고 나간 건, 연말이 주는 분위기 영향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걸 느끼고 싶었다. 군데군데 남아 있는 눈 무더기, 약간 어둑해지는 시간, 매서운 날씨. 그 모든 게 연말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또 한동안 만나지 못한 스스럼없는 친구를 보고 싶기도 했다.
약속 장소 앞, 버스에서 내렸다. 홍이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다. 두 명이 더 있었다. 거의 45년 만에 만나는 ‘상’과 홍의 친구 ‘후’까지. 나이 든 남자들 셋이 버스정류장에서 나를 반겼다. 길에서 마주쳤다면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 모습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지 추운데 왜 나와 있느냐고 했더니, 얼른 보고 싶어서 그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너스레 떠는 말에서 겨우 젊은 시절의 ‘상’ 모습이 떠올랐다. 뜻하지 않은 만남이었다.
“술 한 잔, 해야지.” 홍이 말했다. 그들은 벌써 약간 취기가 있었다. 셋이 만나 술을 마시다 옛이야기가 나왔고, 근처에 내가 산다고 홍이 말하는 바람에 갑자기 부른 모양이다. 괜찮다. 이 나이에 누구를 만나면 어떤가. ‘상’은 예전에 휴가 나왔을 때, 홍이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 처음 만났다. 군복 입은 모습, 마루에 앉아 군화 끈을 풀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우리는 어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 후, 만난 적 없다. 가끔 홍의 편에 소식을 듣긴 했어도.
넷이 우르르 몰려 들어간 식당에서, 상은 가끔 그때 생각이 났다며 어머니 안부를 물었다. 사람은 이렇게 다시 만나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다니. 모두 결혼해 아들 딸 낳아 결혼시켰다. 심지어 딸은 내가 몸담았던 대학교에 다녔단다. 그때 연락하고 싶었는데, 딱 한 번 본 인연 때문에 그러긴 어려웠다며 웃었다. 웃는 모습에서 군인이었던 상의 모습이 오르르 되살아났다. 상은 목소리에서 스물두 살의 내가 떠오른다고 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홍이 내게 술 한 잔을 따라주었다. 이런 날은 술 한 잔 해야 한다며. 나쁘지 않았다. 술 한 잔, 그래 꼭 한 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넷은 술을 한 잔씩 따르고 만남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될 줄 몰랐다고, 이런 날 술 한 잔 안 하면 언제 하느냐며 회포를 풀었다. ‘술 한 잔’에 이런저런 의미를 마음껏 부여하며 즐겁게 웃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딱 한 잔이 아니었다. 마시고 또 마시다 보니 각자 한 병씩 마신 격이다. 나는 그 한 잔도 마시지 못하고, 들었다 놨다만 했다. 그런 내 모습 보고 한 친구가 우스갯소릴 했다. 장미란 선수는 역기를 그렇게 들었다 놨다 하더니만 차관이 되었는데, 나는 술잔을 들었다 놨다 하다 뭐가 될 건지 기대된다고. 그 말에 우리는 또 와르르 웃었다. 어릴 적 친구는 몇십 년 후에 만나도 스스럼이 없다. 홍으로 인해 엮인 사람들이지만 금세 다 친구가 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술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하고 일어섰다. 마음만은, 한 잔이 아니라 듬뿍 취한 것처럼 기분 좋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논두렁 밭두렁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부르던 옛날 사람들처럼, 술 마시다 나를 부른 친구들의 그 마음이 정겹다.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 문제가 아니라, 함께 어울린다는 게 의미 있지 않은가. 단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더듬거리며 기억을 찾고, 추억을 그리워한 그 마음이 예쁘지 않은가. 버스에서 내리는데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래도 마음은 아랫목에 앉아 있는 듯 따뜻해졌다. 술 한 잔 때문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