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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걸으며 든 생각들

by 최명숙

눈길을 걸었어. 길은 눈으로 연결돼 있었지. 펑펑 쏟아지는 눈은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듯했어. 바로 오늘이야. 아침에 친구가 전화를 했어. 내리는 눈을 보며 전화를 받았지. “오늘 점심 먹자, 나와.” 조금 망설였어. 눈 오는 날 나들이가 부담되었거든. 차를 가지고 나가는 건 안 되는데, 걷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해서. 내 마음을 금세 눈치챈 친구가 성화를 했어. 오늘 안 나오면 다시는 안 만난다고. 친구의 앙탈이 귀엽고 우스웠어. 그래서 나갔던 거야.


버스를 탔는데 눈이 함박지게 내리는 거야. 차창 밖을 내다보며 눈 감상을 하노라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 친구 둘이 기다리고 있더라고.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집에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뜻하지 않게 송년회를 하게 된 거잖아. 하, 그러고 보니 올해는 몇 번이나 송년회를 하는 건가. 자꾸 이렇게 나와서 먹으니까 혈당이 오르는 거란 생각이 들었지. 셋이 손잡고 음식점으로 갔어.


우린 중식당에서 거하게 점심을 먹었지. 혈당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걸 오늘은 망각하기로 했어.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말을 믿고. 다시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어. 별 건 아니야. 시답잖은 이야기일 수 있고, 심각한 이야기일 수도 있어. 요즘 매스컴의 과한 알 권리 취재, 그것의 폐해가 주된 화제였어. 위험 수준에 이른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해. 갑자기 두려워졌어. 유명해질까 봐. 사실, 그럴 일도 없는데. 아무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를 타지 않았어. 걷기로 한 거야. 집까지 6km 정도니까 걸을 만해. 운동 삼아 걷다 보면 오늘 운동량을 채울 것도 같았지. 날씨는 포근했어. 눈은 계속 펑펑 내리고, 하얗게 덮인 눈길을 우산 쓰고 걸었어. 드문드문 걷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싶었어. 어떤 이는 우산을 쓰지 않아 눈사람처럼 되기도 했어. 그들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같은 서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 맞잖아.


불쑥 떠오르는 날이 있었어. 초등학교 4학년 때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는 날이었어. 눈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허리까지 푹푹 빠졌지. 눈이 하도 많이 와서 아무도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없었어. 나는 어른들이 말리는데도 집을 나섰지. 아무도 다니지 않은 길, 온통 하얗기만 했어. 한쪽 다리가 푹 빠졌다가 다른 한쪽 다리가 빠지고, 눈 때문에 엎어지지는 않았지만 허리까지 내린 눈을 헤치고 가기란 쉽지 않았어. 도중에 무섬증이 일기도 했지. 내가 성숙해 가면서 그렇게 홀로 눈길을 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 있었어. 그때마다 생각했지. 어린 열두 살짜리였을 때도 헤치고 갔는데, 지금 못할 게 뭐냐고.


그 생각이 나니까 공연히 눈물이 나는 거야. 바람이 불지 않았고, 춥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경험은 연결되고 연결되어 지금의 나를 만드는 거야. 힘든 날들은 삶의 근육을 만드는 날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희한하게 눈물이 멈추었고 가슴이 쭉 펴지는 거야. 그래, 나는 나야. 모 가수의 ‘나야 나’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르기도 했어. 뜬금없지? 어느 가수가 경연에서 자기를 아주 기꺼워하는 표정으로 그 노래를 불렀던 것 말이야. 그래서 가슴이 쭉 펴졌던 걸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어가다가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만났어. 난 거기에 눈꽃을 만들었어. 일곱 꽃잎, 아홉 꽃잎, 두 송이 눈꽃을. 동심을 갖고 있어서 그래. 나는 그런 내가 좋아. 눈꽃을 만들고 사진을 찍었어. 어릴 적에도 그랬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눈꽃 만들기를 좋아했어. 안마당에 만들다 할머니가 눈 쓸기 망하다고 걱정하시면, 뒤란으로 가서 황매화 울타리 바로 아래에 눈꽃을 만들었어. 그뿐인가. 눈 위에 누워 눈 사진을 찍기도 했지.


눈꽃을 뒤로하고 가는데, 어머나! 공원에 청소년들이 득시글대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지. 소년과 소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어. 이미 만들어 세운 것도 셋이나 있는데, 더 크게 만들겠다며. 모두 중학생들이었어. 해맑은 그 모습이 얼마나 고운지 나도 모르게 말을 걸고 같이 눈을 굴렸지 뭐야. 그러다 눈사람 앞에서 사진도 찍었어. 소년들은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눈을 굴리는 거야. 손 시리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괜찮대. 내가 셀카로 사진을 찍으려니까 남학생이 찍어드릴까요, 묻는 거야. 얼른 그러라고 했지.


옆에서 여학생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어. 눈을 붙이는데 내가 훈수를 두었지. 같이 이야기하다가 물었어. “무슨 과목을 좋아해?” 내 물음에 한 소녀가 까르르 웃으며 공부 좋아하지 않는대. 나도 소리 내어 웃었어. “그럼 시는 좋아해?” 다시 물었지. 다른 소녀가 좋아한다잖아. 얼마나 그 말이 예쁘게 들리던지. 내가 중학교 때 외운 시를 지금도 외우고 있다고 하니까 소녀들이 또 화르르 웃는 거야. 별 것도 아닌 것에 자꾸 웃지 뭐야. 옛날의 나처럼. 우린 그런 정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가 싶었어. 소녀들에게서 그만할 때의 내 모습을 보았어.


길가 참빗살나무에는 작고 빨간 열매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어. 눈과 찬바람을 견디고 나면 파릇한 새싹이 나오겠지. 대단해. 사람들은 모자를 쓰고 두꺼운 외투를 입고도 춥다며 겨울을 나는데, 저렇게 싹눈과 꽃눈을 달고 겨울을 나잖아. 내년 봄에 새싹과 꽃을 보면 크게 칭찬해 주리라 마음먹었어. 겨울이 와야 봄이 오고, 어린 날이 있어야 성숙한 날이 있듯, 모든 건 다 연결되어 있지.


그러고 보면 세상 모든 게 다 그래. 집까지 연결된 눈길을 걸으며 든 생각이야. 사람과 사람도 그렇잖아. 생판 모르는 사람도 여섯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이라잖아. 그렇게 다 연결이 돼 있잖아.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고 어느 정도 허물을 감싸주고 이해해 주고 그러면 안 될까. 눈길을 걸으며 든 생각이야. 우리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깜짝 놀랐어. 눈사람이 다섯 개나 세워져 있는 거야. 사람들 마음이 다 비슷해. 그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된 것 아닌가 싶어.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포근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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