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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인가, 소망인가

건강하고 착하면

by 최명숙


토요일 오후, 딸의 SOS. 사위와 딸 모두 몸살이 나서 육아가 힘들다는 거였다. 별일 없으면 와서 도와달란다. 들어온 피아노도 볼 겸. 하던 일을 미루고 달려갔다. 차가 너무 막혀 조바심이 났다. 동부간선도로는 언제나 차량 통행이 잦다. 토요일과 일요일 9시 전이라면 모를까, 다른 시간은 대부분 다 막힌다. 그래도 일단 출발했다.


강변에 조성된 코스모스 군락지가 보이는 곳부터 막혔던 도로가 뚫렸다. 왼쪽으로 멀리 도봉산이 보였다. 벌써 퇴색된 단풍은 금세라도 우수수 떨어지고 말 것 같았다. 어느새 저렇게 가을이 깊었나 싶다. 코스모스 단지는 꽤 넓어 보였다. 꽃 속에서 사진 찍는 사람, 거니는 사람 등이 보였다.


가는 중에 전화가 왔다. 딸이었다. 어디까지 왔냐는 물음에 아직 40분 정도 더 걸린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저녁을 시간 맞춰 준비하려는 모양이었다. 아이들 먹을 것 있으면 우리는 간단히 시켜먹자고 했다. 딸은 알아서 할 테니 조심해서 오란다.


딸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가을 해는 너무 짧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손자 둘이 팔을 벌리고 뛰어온다. 사위와 딸은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쳐져 있다. 둘 다 직장생활과 육아에 지쳐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듯 보였다. 나를 보자 다섯 살짜리 온이가 내 손을 잡아끈다.


“할머니, 제 방으로 가요. 어서요.”

“왜?”

“피아노 있어요. 할머니가 사주신 피아노요.”

신이 나서 내 손을 잡아끄는 온이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기특하게도. 어린이집에서 교육을 받은 대로 하는 것이리라. 안 그래도 궁금한 피아노였다.


온이 방에 놓인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가만히 건반을 눌렀다. 우리 집 피아노와 확실히 소리가 달랐다. 맑고 은은한 소리와 부드러운 느낌의 건반. 딸이 반할만했다. 뒤따라 들어온 딸이 온이 표정을 보며 빙긋 웃었다.


“엄마, 온이 무척 좋아해요. 툭하면 이 방에 와서 의자에 앉아 있고, 건반 만져요. 아직은 치지 못해도. 이제 시간 나는 대로 레슨 해주려고요.”

“어서 건강해지기나 해. 피아노는 마음에 드니?”

“그럼요, 하나도 부러울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겠지. 그 마음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 피아노를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가 5년 동안 없이 살았으니. 딸은 아픈데도 한 곡 연주했다. 요즘 손을 풀고 있단다.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시간이 없을 텐데, 연습하고 있다는 말이 감동으로 밀려왔다. 온이는 딸의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다.


몇 년 전 여행길에 지인의 문화공간에 들른 적이 있다. 마침 하우스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청년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그때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맨 앞줄에 앉은 초등학교 저학년 남학생 둘이 꼼짝 않고 그 연주를 진지하게 다 듣는 것이었다. 본인이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얼마나 아름답고 기특한가. 어린이에게 지루할 수 있는 긴 피아노 연주곡을 어떻게 그렇게 들을 수 있는지. 어릴 적부터 듣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피아노 연주도 좋았지만 그 아이들에게 깊이 감동했다.


그 이야기를 딸에게 해주었다. 우리 온이도 그렇게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태교를 음악으로 했고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클래식과 각종 음악을 다 듣고 있으니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딸이 웃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욕심을 너무 부린다며. 그냥 보통 아이로 자라도 좋으니 건강하고 착하면 된단다.


온이가 어릴 적부터 악기 연주를 듣고, 배우며, 자라기를 바랐다. 피아노에 관심 갖고 있으니 기대해도 되겠다고 했다. 딸은 욕심부리지 말란다.

“이 정도가 무슨 욕심이야? 소망이지.”

“저는 뭐든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자연스럽게 되면 좋고요.”

맞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우리 딸은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 누가 보면 결핍된 것 하나 없이 자란 사람처럼. 그건 환경이 아닌 성격인가. 아무튼 가끔 답답할 정도로 욕심이 없다.


“그래, 네 자식인데, 내가 배 놔라 밤 놔라 할 것 없지.”

“그건 아니고, 엄마.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하게 둔다고요. 엄마도 우리한테 그랬으면서, 손자에게는 욕심이 생기나 봐요.”

“알아, 안다고. 근데 그건 욕심 아니고 소망이라니까!”

웃고 말았다. 내가 간여할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손자들을 보면 바람이 생긴다. 그래 그건 욕심이 아니고, 바람 즉 소망이다.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놀아주었다. 현재 내가 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 소리가 피아노 소리보다 더 맑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딸의 연주보다도 아이들 놀고 떠드는 소리가 더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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