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아들과 대화할 새가 없다. 새벽 1시까지 꽤 진지한 대화를 할 때 있지만, 그건 아주 가끔이다. 그만큼 아들은 바쁘다. 가끔 하는 요즘 대화 주제는 정치이야기 또는 문학이야기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다. 꽤 괜찮은 일이다. 관심사나 지향하는 게 같거나 비슷해야 이야기가 되는 법이니까. 시간이 여의치 않아 그렇지, 그런 부분은 서로 잘 맞는 편이다.
한 친구는 딸과 정치성향이 극과 극이어서 대화의 문을 닫았다고 한다. 모녀지간인데 그럴 수 있느냐고 했더니, 그러니까 이념이 무서운 거란다. 딸이 아예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해서 힘들다며. 아들은 요즘 소설을 쓰네, 동화를 쓰네, 하며 내게 묻는 게 많다. 수강료를 내지 않고 핵심을 다 뽑아가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새벽 1시가 되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면 친구는 부러워한다. 아들딸과 그렇게 이야기 나눠 본 적이 없다면서.
아들은 바쁘다. 아침 일찍 나가서 자정이 다 돼 돌아온다. 그러니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 힘들다. 어쩌다 이야기를 하게 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게 그래서다. 아들만 바쁘냐 하면 아니다. 나도 바쁘다. 다른 점은 나는 아들에게 시간을 할애하려고 하는데, 아들은 나보다 그게 적다는 거다. 내가 느끼는 것이지만. 아들이 대화를 시도하면 나는 어떡하든 응해준다. 아들은 그렇지 않다. 필요한 것은 돈이든, 감정이든, 지식이든 내게서 인출해 간다. 내가 자동인출기는 아닌데.
아들이 휴대전화를 만지는 동안 나와 대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들도 그걸 알고 있는 듯하다. 늘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사는 정도는 아니나, 아침에 일어나면 휴대전화를 찾아 뉴스를 검색한다. 아침 식탁 차리는 내 앞에서. 그게 못마땅하다. 아침 인사 후 바로 휴대전화를 여는 아들. 두 번 말했다. 그러지 말라고, 대화를 하자고. 아들은 즉시 그러겠다고 했지만 혼자 살 때부터 생긴 버릇인지, 요즘 사람들의 보편적 행동인지, 휴대전화를 여는 게 먼저다.
내 잔소리를 염두에 두어서 그랬을까. 아들이 휴대전화를 켜면서 작게 말하곤 한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고.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 큰 성인이 휴대전화 보는 것도 어미 눈치를 보는 모습이 우스웠다. “무슨 일은. 그냥 열면 되지, 왜 눈치를 봐?” 내 말에 찔렸는지 아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 전이니까요. 궁금하잖아요.” 아침 식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게 좋지, 전화기 들여다보는 게 좋으냐는 내 말에, 아들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엊그제 일이다.
오늘 아침. 아들은 식탁에 가만히 앉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계란찜 뜸을 들이고 있을 때였다. 내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으냐고 어깃장을 놓듯 물었다. 아들이 빙그레 웃으며 휴대전화를 열었다. 누구 지지도가 얼마고, 또 무슨 사건이 있었고, 날씨는 어떠하다고 말해주었다. 그건 나도 검색해 보면 알 수 있고, 어제 학생들과 있었던 이야기나 요즘 하는 작업 또는 글쓰기 이야기 좀 해보라고 했다. 저녁에 하잔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들어온다며.
아들은 식탁에서 새로 시도한 계란찜 평을 하고, 점심 도시락으로 야채 볶음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게 무슨 대화냐며 투덜댔다. 아들이 웃으며 아카데믹한 대화를 원하시는 거냐고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별다르지 않은 일상, 한두 마디 주고받는 말, 그것이어도 된다. 아니라고 했다. 저녁에 우리는 대화할 수 있을까.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꼭 대화라는 명칭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을까 말이다. 갑자기, 우리는 충분히 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자와 전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누는 문자와 전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자질구레한 이야기부터 필요한 이야기까지 모두 나누고 있는 편이다. 현대문명의 이기인 휴대전화를 통해 누리고 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 몇 시쯤 귀가할 것인지도. 그러니 딱히 시간을 정해 대화를 나누자고 할 필요 없다.
내일부터 아들이 아침 식탁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져도 잔소리하지 않으리라.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면서 전화기를 여는 건, 내 눈치를 보는 행동 같아서다. 집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두련다. 생각해 보면, 우린 대화가 부족하지 않다. 수시로 소통하고 있는 편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엔 내가 먼저 물어보리라.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고. 아들은 환히 웃으며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대화는 이만하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