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아침부터 사락사락 내리던 눈이 멈추고 오후엔 햇살이 비쳤다. 잿빛과 흰 구름 사이에 언뜻언뜻 푸른 하늘이 보인다. 응달에 남은 눈이 마음에 걸려도 뒷산에 오르고 싶었다. 한 이틀만 산바람을 쐬지 않으면 마음이 싱숭생숭 견딜 수 없다. 나가보자, 나가보리라. 두툼한 점퍼를 입고 모자까지 썼다. 산바람이 찰 수 있으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섰다. 승강기에서 만난 이웃에게 인사하니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산책이라고 짧게 말하자 건강을 위해 운동이 최고죠 한다. 친절한 이웃이다.
우리 동은 15층 아파트에 모두 서른 가구가 산다. 솔직히 누가 누군지 잘 모른다. 입주했을 적부터 십여 년 이상 같이 사는 네 가구 이웃과 재작년에 이사 온 옆집만 정확히 알 뿐이다. 그래도 승강기에서 만나면 무조건 인사한다. 작년 여름에 집으로 들어온 아들에게도 몇 번 당부했다. 사람들에겐 꼭 인사하라고. 모두 우리 이웃이라고. 오후에 만난 사람은 어쩌다 쓰레기 버리러 나갈 때 스치듯 만나게 되는 11층에 사는 이웃이다.
승강기 안 벽에 우리 집 바닥은 이웃의 천장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맞는 이야기다. 우리 집 위층엔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사내아이 하윤이가 살고 있다. 분양받은 이 아파트로 왔을 때 하윤이는 백일 갓 지난 아기였다. 아기 울음소리가 위층에서 들리면 나는 참으로 든든했다. 위층에 누가 살고 있다는 게 그렇게 훈훈하고 의지될 수 없었다. 그 아기가 커서 뛰어다닐 때는, 시끄럽다기보다 저렇게 컸구나 싶어 슬몃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승강기에서 하윤이 부모는 나를 보면, 아이에게 시켰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내가 저어했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하윤이 뛰는 소리가 나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고. 앞으로 더 뛰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덕담까지 했다. 하윤이 부모는 내가 그저 하는 말로 생각했을지 모르나 그건 사실이었다. 그 하윤이가 나와 함께 산책한 적 있다. 그 후 만나면 내게 꼭 인사하고 언제 또 산책 같이 하자고도 한다. 지금은 산책 한 번으로 거의 친구가 되었다.
옆집 세희네는 나보다 십오 년 아래쯤 되는 부부가 딸 하나와 살고 있다. 지난여름에 삶은 옥수수 몇 개를 건넸더니, 며칠 후 시골에서 보내준 채소라며 오이와 호박을 우리 현관문에 걸어놓고 문자를 했다. 세희엄마가 출근하면서 놓고 간 거였다. 세희는 고등학생인데, 눈웃음이 아주 예쁘다. 어쩌다 승강기에서 만나면 밝게 웃으며 인사한다. 시간 많을 때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했더니,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아직 우리 집에 온 적 없지만 그 예쁜 눈웃음만 생각해도 기분 좋아지는 이웃이다.
뒷산으로 오르기 위해 아파트 후문 쪽으로 나오다 깜짝 놀랐다. 보라색 봄까치꽃이 돌 틈에 피어 있는 게 아닌가. 어머! 네가 피었구나. 눈보라를 어찌 이겨냈어? 이뻐라.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해마다 그곳의 봄까치꽃이 가장 먼저 핀다.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았더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너도 내 이웃이야. 만날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반가운 마음에 혼잣말이 길었다.
한참 들여다보고 뒷산 오르는 어귀 오솔길로 들어섰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내부에서는 봄 맞을 준비에 분주할 테지만. 메타세쿼이아 나무 아래 개망초가 누런 떡잎을 제치고 파란 새잎을 밀어 올린다. 지칭개와 좁쌀냉이도 그 옆에서 눈을 뜬다. 벌금다지 나물도. 너희들도 내 이웃이야. 산에 오르고 내릴 때마다 꽃으로 나물로 내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고향의 정취를 불러오는. 중얼중얼.
산에서 나는 냄새는 엊그제와 다르다. 봄을 품고 있는 훈풍에 눈이 다 녹아 응달에나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덜꿩나무 위에 동고비가 앉았다 후드득 날아간다. 나뭇가지를 들여다보았다. 움틀 준비한 싹눈이 보인다. 얼마 후면 바로 잎사귀가 나올 것만 같다. 후드득 날아가는 동고비에게도 말을 걸었다. 모른 체하고 가버린다. 그때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아, 반가운 종달새 노랫소리다. 삼 일 전 산에 왔을 때만 해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제 정녕 봄이 왔다. 경쾌하고 높은 음색. 어찌나 반가운지 종달새를 향해 말했다. 종달새야, 너구나. 반가워, 내 이웃! 내 말을 들었는지 종다리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만 이웃인가. 자연도 이웃이다. 하늘과 구름뿐 아니라, 자연에서 만나는 나무와 풀과 새들까지도. 산에 오르고, 밖에 나가기만 하면, 만나는 이웃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존재감을 인식한다. 그래서 외롭지 않다. 천변 산책할 땐 물오리나 왜가리 물고기와 교감하고, 들꽃과 이야기 나눈다. 산에 오르면 또 산에 사는 이웃들과 소통한다. 모두 내 이웃들이다. 사람도, 자연도, 동식물도. 이렇게 이웃과 교감하며, 오늘도 나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