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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길, 깊고 그윽해지는

명상

by 최명숙

나는 무엇에든 이름 붙이기 좋아한다. 이름 외우기도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든다면 그게 취미이며, 그래야 보통명사가 내게 다가와 의미를 갖는 듯해서다. 세상살이를 견디는 나만의 방법이랄까. 그보다 나의 별스런 취미라는 게 더 설득력 있다. 이름 외우기도 그렇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취미는 집, 자동차, 안마의자, 인형, 심지어 감자칼에도 나타난다. 당호는 ‘월하산방’이며, 자동차는 ‘프린’, 안마의자는 ‘안의’, 악어인형은 ‘악우’, 감자칼은 ‘달챙이’다. 모두 글감으로 해 한 편씩 수필을 지은 적이 있어 생략하지만, 감자칼이 달챙이인 것은 옛날 우리 집 부엌에 있던 달챙이 숟가락의 역할을 하는 게 감자칼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연필깎이에도, 자주 쓰는 컵에도, 스테이플러에도, 쓰레기통에도 이름을 붙인다.


나처럼 빠른 시간 내에 이름을 외우는 사람은 드물 거다. 학교에 재직할 때 학생들 이름을 빨리 외웠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두 주간 정도만 소요되면 삼분의 일 정도는 외웠으니까. 수강생이 적을 경우엔 거의 다 외웠다. 이름을 부르면 학생들이 눈이 동그래지면서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수업 중에 화장실 가는 척하며 슬쩍 가버리는 경우가 절대 없다. 무엇보다 금세 나와 친해진다. 학습자가 교수자를 좋아하게 될 때, 그 강좌는 효율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나인데, 즐겨 다니는 산책로와 드라이브 길에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남한산성에 가면 ‘소운로’라는 길이 있다. 내가 붙인 이름이다. 일방통행로 윗길인데, 단풍이 얼마나 아름답고, 나무가 울울한지 모른다. 언젠가 지방에 있는 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그 길을 넘는데, 울울창창한 숲이 지친 나를 쓰다듬고 안아주는 것 같았다. 또 언젠가 마음이 심란할 때 야시장이 서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 곱게 물든 단풍이 인생을 말해주는 듯했다.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때 내가 이름을 붙였다. 소운로라고.


소운(素雲)은 내 호다. 소운로, 내 길이라는 의미다. 하동에 가면 정동원 길이 있고, 또 어디 가면 무슨 길, 또 무슨 길, 유명한 사람들 이름 붙인 길이 제법 있다. 솔직히 나는 유명인이 아니고 대단하게 잘난 사람도 아닌데, 내 길이 있다. 스스로 붙인. 우습다고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다. 이미 그 길이 내 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주위엔 제법 있으니까. 그들은 비아냥대지 않고 재밌어했다. 자연의 주인은, 나만 아니고 너만도 아닌, 우리 모두다. 즐기는 자의 소유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즐겨 걷는 천변 산책로의 이름도 지었다. ‘명상의 길’이다. 설악산 입구에 있는 길도 명상의 길이어서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싶었는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디든 산책하기 좋은 곳에 가면 명상의 길이라는 푯말을 흔히 보곤 한다. 사실 흔한 이름이 좋은 이름이기도 하다. 그만큼 선호도가 높은 걸 말하는 것이므로. 천변 산책로 이름도 또 다른 내 호를 붙일까 했는데, 그건 너무 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기승전‘나’가 되면 곤란하지 않은가. 아무튼 우리 마을 천변 산책로 이름은 ‘명상의 길’이다.


명상(冥想) 또는 명상(瞑想)은 눈을 감고 차분하게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일컫는다. 눈을 감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명상’을 붙일까 말까 고심했다. ‘사색의 길’은 어떤가 생각했다. 사색(思索)하다 사색(死色)되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서 그만두었다. 이름은 잘 짓고 볼 일이기 때문이다. 고심하다가 명상(冥想)을 택한 것은 ‘명(冥)’이 어둡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그윽하다, 깊숙하다, 아득하다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그윽하다와 깊숙하다는 의미가 강하게 끌어당겼다.


명상의 길을 걸으면 저절로 마음이 깊어지고 그윽해지며, 아득해지기도 한다. 들뜨고 산란했던 마음이 가만히 가라앉으며 평안해진다. 그윽하다는 단어를 좋아하는 나다. 눈이 그윽해 보이는 사람, 얼마나 멋진가. 그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면 한없이 설레고 마음이 맑아지지 않던가. 넓지도 좁지도 않은 개울 폭, 물 흐르다 만나는 여울, 포말, 한 물에 노는 물오리와 왜가리, 저녁 햇살에 높이 뛰어오르는 송사리 떼, 길섶에 철 따라 피는 들꽃, 산책하는 한 마을 사람들, 명상의 길 풍경이다.


이만하면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내가 지은 산책로 명상의 길, 적확하게 맞지 않는가. 그 길을 걸으면 산란했던 마음이 정돈된다. 물소리가 나를 가만가만 다독여주고, 들꽃과 초목, 물오리와 왜가리가 벗이 되어준다.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며 교감한다. 사람과 교감하는 것 못지않은 느낌이 있다. 차분하게 생각하며 걷는 명상의 길, 그 길을 거의 매일 걷는 건 행복이다. 오늘도, 나는 명상하며 걷는다. 깊어지고 그윽해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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