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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Mar 11. 2024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날

처음

   

휴일 오후, 산에 갈까 산책 나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전날 긴 산행을 한지라 산이 약간 부담스러웠고, 산책은 솔직히 좀 심심했다. 종달새 지저귀고 훈기 머금은 산바람이 부는 산이 더 매력적이긴 하다. 가볍게 뒷산 둘레길 정도 걷는 걸로 잠정 결정.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전화벨이 울린다. 딸이다. 응, 왜? 키득키득 웃는 소리. 딸이 아니다. 온이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단다. 이 무슨 횡재인가. 온이 스스로 전화한 건 난생처음이다.


“우와! 온아! 어떻게 전화를 했어? 엄마가 걸어준 거야?”

“아니요, 제가 했어요. 엄마 전화기에서 ‘엄니’라고 쓰여 있는 거 눌렀죠. 이제 할머니 전화번호도 외울 수 있어요.”

“해 봐.”

온이가 또박또박 내 전화번호를 말한다. 요즘 부쩍 문자에 관심을 갖더니 이제 숫자는 물론 글자까지 웬만한 건 척척 읽어낸다. 딸의 전화기에 나는 ‘엄니’로 저장되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어머니가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엄니라니. 딸의 취향도 참 토속적이라는 생각에 씩 웃음이 나왔다. 


나를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니 감동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느냐고 재차 묻는다. 솔직히 말했다. 산에 갈까, 개울가 산책할까 고민 중이라고. 그럼, 산으로 가세요. 온이가 결정해 주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산에 가면 나무를 볼 수 있으니까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목도리 하고, 모자 쓰고, 장갑도 끼라고 한다. 하나하나 했는지 묻는다. 하는 양이 웃겨서 그대로 따랐다.


이제 다 했으면 패딩을 입으란다. 입었다고 했더니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 열고 잠겼나 잘 확인한 후 엘리베이터 타란다. 딸이 그렇게 일일이 지시하는 걸까. 그래서 나에게 온이가 그러는 걸까. 웃음이 나고 귀엽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나니 1층을 누르란다. 마치 나의 일거수일투족 다 보고 있는 것 같다. 보이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지만 다 안단다. 천리안을 가졌나 보다, 우리 온이가. 


온이에게 전화를 끊을까 말했더니 더 이야기하잔다. 지금 식구들은 뭐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또온이는 아빠와 자고, 엄마도 쉬고 있으며, 자기는 소파에 앉아 나에게 전화하는 중이란다. 새 학기 되어 바뀐 유치원 선생님과 반 친구들에 대해 물었다. 모두 좋단다. 그중에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고 어떤 친구는 아직 친해지진 않았는데, 친해지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걱정 없단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반응해 주면 된단다. 반응이 뭐야? 했더니, 맞장구!라고 답한다. 맞장구를 쳐주는 게 친해지는 방법이라니 이렇게 명쾌할 수가. 


뒷산 오르는 입구의 메타세쿼이아 나무 군락지 근처에 이르렀을 때,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온이 마음처럼 맑았다. 예전에 온이와 함께 지나간 길이기에 물었다. 생각나느냐고. 생각난다며 다음에 함께 걷자고 한다. 생각난다는 건 아무래도 그냥 하는 말 같았다. 그래도 믿어주기로 했다. 그때 메타세쿼이아 나무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고 하니, 그 사진을 전송해 달란다. 


온이와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숨 가쁜 소리가 들렸나 보다. 천천히 걸으란다. 자상하면서도 제법 대안 제시를 잘해 대화가 재밌다. 다음엔 무슨 말을 할까 기대되기도 했다. 오리나무가 옆에 있고 저만큼에 팥배나무가 있으며 지난가을에 떨어진 낙엽 덕분에 길이 폭신폭신 부드럽다고 말했다. 온이는 새소리 듣고 싶은데 들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마침 나무 찍는 딱따구리 소리가 있어 전화기를 가져다 댔으나 온이에게 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오르막길이다. 그만 전화를 끊자고 했다. 오르막이라 힘들다고. 다음에 또 전화하겠다며 온이가 전화를 끊었다. 재잘거리는 온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바로 후회했다. 저 맑은 종달새 소리보다 더 예쁘고, 꽃봉오리를 밀어 올리고 있는 생강꽃보다 더 고운 온이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보름 후에 가기로 한 약속을 꼭 지키리라. 그때 온이는 같이 중랑천 산책을 하자고 했다. 산책 좋아하는 건 날 닮았지 뭔가. 함함하다. 


“산에서 내려올 때 조심하세요. 넘어지지 말고요.” 전화 끊기 전에 온이가 한 말이었다. 엽렵한 우리 온이. 내려올 때 온이가 한 말을 떠올리며 빙긋빙긋 미소 지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종달새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내 마음은 맑음이었고, 종달새 노래보다 더 높은 소프라노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온이가 시키는 대로 산에 가길 참 잘했다. 온이가 처음 스스로 전화한 날,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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