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 한마디

by 최명숙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영원히. 열여덟 살이었던 그때로부터 이순을 넘긴 지금까지 그녀의 말 한마디는 따뜻한 울림으로 남아있음에도. 말은 곧 그 사람이다. 글도 물론 그 사람이라고 한다. 그만큼 말과 글에는 그 사람의 내면이 드러난다. 그녀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당시 그녀는 유명 가수였다. 그녀가 부른 노래가 매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때 나는 그녀가 소속된 레코드사 옆 고모네 칼국수 가게에서 배달과 설거지를 했다. 그녀는 가게로 직접 오지 않았지만 가끔 근처 당구장이나 사무실에서 칼국수를 주문하곤 했다. 그날은 당구장에서였다.


5층까지 배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던 때니까. 배달 쟁반을 들고 당구장 문을 어깨로 밀며 들어가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탁자로 다가와 앉았다. 음식을 덮었던 상보를 걷었다. 그런데 칼국수 위에 까만 머리카락이 길게 누워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상보를 얼른 덮었다.


“다시 가져올게요.”

미안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왜?”

그녀가 뜨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붉어져 얼버무리는 나를 보며 그녀가 상보를 제쳤다.

“이것 때문에 그래? 괜찮아. 이렇게 먹으면 돼.”


언제 그걸 보았던 걸까.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하얗고 고운 손가락으로 건져내고 젓가락으로 칼국수를 휘휘 저었다. 깜짝 놀랐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태도에. 누구라도 쉽지 않았을 거다. 적어도 눈살이라도 좀 찌푸려 불쾌한 내색을 할 만한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칼국수를 먹는 그녀. 계단을 내려오는데 가슴 가득 따뜻한 기운이 차올랐다. 감동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거무튀튀한 무채색 건물들이 들어선 좁디좁은 시장 골목이 정겨운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듯했다.


성인이 되어가며 그녀가 했던 따뜻한 말과 행동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쉽지 않았다. 얼마만큼 너그러워야 그런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건지. 자기에게는 너그럽고 남에게는 인색한 게 보통 사람들의 성정인 듯하다. 나도 물론 다르지 않다. 그래도 가끔 나를 돌아보는 건 그녀의 말이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한 번쯤 그녀에게 그때 고마웠다고, 내가 살아가는 데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아마도 몰랐을 거다. 아니, 기억조차 없을 거다. 내가 찾아가 말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라고 믿었다.


오래전에 고모에게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있다. 그때 고모는 워낙 그 사람이 그렇다는 거다. 마음이 넓고 착하다고. 잘 아는지 물었더니 옆 동네 사는데, 가끔 교회에서 만난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잘 안 보인단다. 듣느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교회로 가 만나리라 생각했다. 그런 날이 오리라 믿었다.


또 시간이 흘렀다. 현대인의 삶이란 왜 그리도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인지. 교회에서 만나지 못하면 그 집에 찾아가도 될 일이었다. 고모와 같은 교인이므로. 그 느슨함이 문제였다. 바쁜 일과에 치어 살던 어느 날, 뉴스에 한 줄 자막이 떴다. 그 가수의 부음이었다. 기운이 쏙 빠졌다. 조용히 고개 숙이고 묵념했다. 그녀가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한 번씩 그녀가 떠오른다.


고의가 아닌 실수로 내게 불편함을 끼치거나 손해를 끼쳤을 때, 웬만하면 따지지 않고 넘겼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너그럽다는 등의 호평 비슷한 것을 듣는 것에는 그녀의 영향도 있다. 실제로 나는 너그럽지 않다. 까다롭고 꼼꼼해서 스스로를 괴롭히기까지 하는 덜 된 사람이다. 그런데도 가끔 그런 말을 듣는 건 순전히 그녀에게 받았던 감동의 여운이 영향을 끼치기 때문인 듯하다.


머리카락이 들어간 음식, 버리고 다시 가져오는 게 맞다. 그건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5층까지 힘들게 음식을 들고 온 나를 배려한 것일까. 아니면 머리카락 하나쯤 들어갔다고 못 먹을 건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 아무튼 그녀의 그 말과 행동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일 거다. 그 마음이 참 곱다. 따뜻하다.


지금도 가끔 그녀의 노래를 듣게 되면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게 아쉽다. 그녀의 ‘괜찮다’는 말 한마디는 오래도록 따뜻한 빛을 뿌리며 내 삶에 영향을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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