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밖 뒷산 오르는 길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간다. 아파트 정원 화살나무는 발갛게 물든 지 여러 날. 가을이 깊어간다. 삼십 년 전, 그날도 저렇게 은행잎이 물들었던 날이다.
아침 출근길이었다. 도로에는 노란 은행잎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이 무르익어간다. 선득한 기운을 느껴도 가을은 역시 낭만적이다. 은행나무 늘어선 저 길을 한없이 걷고 싶었다. 출근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그래도 현대인의 삶이 어찌 감정대로만 살 수 있으리. 하늘 한번 쳐다보고, 은행나무 한번 쳐다보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살살 밟았다. 어디든 떠나고 싶은 날이었다. 골목을 막 벗어나려는데, 차가 출렁거리며 쿵 소리가 났다. 내 차를 뒤에서 들이받은 것이다. 원아들이 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놓고 차에서 내렸다. 어린이집 차 뒤 범퍼가 약간 깨졌다. 차량 운행이 늦어지면 어쩌지 싶었다.
“아, 갑자기 그렇게 서면 어떡해요?”
우락부락해 보이는 남자가 다짜고짜 내 탓을 했다. 어이없는 일이다. 골목이라 갑자기 서고 말고 할 일도 없었거니와 달리지도 않았다. 그 남자가 뒤에서 달려와 추돌한 것이었다. 안하무인격인 저 남자를 어떻게 상대할까 싶어 겁이 더럭 났다.
“갑자기 서긴 누가 갑자기 서요!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하는 게 먼저지, 누구 탓을 해요.”
나도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남자에게서 술 냄새가 풍겼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은 듯했다.
“아저씨, 술 드셨어요? 경찰 부를게요.”
“이 여자가 술이라니, 누가 무슨 술을? 불러, 불러봐!”
숫제 반말이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애써 진정하면서도 차량 운행이 늦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쌀쌀한 아침 날씨에 원아들이 떨고 있을 것 같았다. 말이 안 통할 게 틀림없는 사람인지라 112에 신고했다. 그때는 휴대폰이 대중화되기 전이었는데, 나는 갖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어디서 반말이에요? 반토막짜리 밥만 드셨나? 잘못했으면 사과를 먼저 해야지. 내 차 범퍼 깨졌잖아요. 물어내욧!”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사과? 누가 무슨 사과. 여자가 재수 없게 아침부터 차를 끌고 나와서는.”
남자는 더 세게 윽박질렀다.
“재주 없게? 이 양반이 어디서 막말을 해!”
나도 목소리를 더 높였다. 사람 품위 없어지는 것 금방이다. 골목에서 싸우는 격이 되고 말았으니. 경찰은 금세 오지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겁에 질린 작은 소리로.
“여보, 누가 내 차를 들이받았는데, 소리 막 지르고 무서워 죽겠어. 이리로 와요.”
내가 상황을 설명했다.
“약한 척 하기는. 나, 지금 바빠! 전화 끊어!”
남편은 내 말을 들은 척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되므로, 누나 동생 하며 지내는 옆집 카센터 김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골목으로 들어오는 차가 없어, 길이 막히진 않았다. 걸어서 지나가는 사람만 흘깃거렸다.
경찰보다 김 사장이 먼저 왔다. 그는 오자마자 상황을 금세 알아차렸다.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범퍼가 깨졌네요. 수리는 안 되고 갈아야겠어요. 여기 골목인데 추돌하셨으니 백 프로 책임이에요. 더구나 술이 덜 깨신 것 같은데, 경찰 오면 음주로 걸릴 것 같아요. 마무리하시죠.”
그제야 남자는 수그러들었다. 음주라는 말에 움츠러든 듯했다. 누가 봐도 그 남자 잘못인데 여자라고 무시하고 윽박지른 것이었다. 떨리던 가슴이 가라앉고 있었다.
“누나, 일단 운행하시고 끝나면 센터로 오세요. 범퍼 주문해놓을게요.”
김 사장은 내게 차에 오르라고 했다. 운행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저녁에 집에 들어온 남편이 물었다.
“잘 해결했어?”
“…….”
“차는 괜찮아? 진짜 무서웠어? 그 말을 누가 믿겠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보다 차가 더 걱정되는 사람과 무슨 말을 할까. 무섭다는 말을 누가 믿겠냐고? 더 기분 나빴다. 나는 늘 씩씩하고 강하기만 한 사람인가. 나도 때로는 보호받고 싶을 때가 있는데.
평생 남편에게 보호받은 기억이 없다. 물론 그 그늘 아래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러다 보니 더 강해졌는지 모르지만. 아니, 강한 척하는 건지도. 아무튼 운명은 자기가 만든다고 하던데, 그것도 저것도 다 내가 자초한 일 같다. 그 일로 일주일 동안 남편과 냉전 상태에 있었다. 그래도 사태 파악을 못한 남편은 기분 나쁜 일이 있나 보다 싶은지, 말도 걸지 않았다.
삼십 년 전의 일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일까. 은행잎 때문이다. 저 길가에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는 은행잎이 그 옛날까지 소환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