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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Aug 05. 2024

산행 보류

핑계


글쎄, 만용이었을까. 만용이 아니라면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더위 탓일 거라고. 산에 오르면서 고민했다. 처음 느낀 몸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산에 오르는 것도 힘든데 고민까지 하자니 더 힘들고 땀이 줄줄 흘렀다. 이런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무력감이 들면서 약간 어지럼증도 느꼈다. 급기야 내 몸에 대한 실망감까지 들어 망연자실할 정도였다. 


산행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집을 나선 건 오전 1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왜 갑자기 등산할 생각이 들었을까. 날은 덥고 하고 있는 일은 진도가 안 나갔다. 그럴 때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게 좋고 그 방법은 산행이었다. 오래된 내 습관이기도 해서 무작정 산으로 향한 터였다. 바깥 온도는 집안 온도보다 훨씬 높아 숨이 막힐 정도였다. 따끈따끈한 햇살이 온몸에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숲 속은 괜찮을 것 같았는데 덥긴 마찬가지였다. 바람 한 점 없어 더욱 그랬다. 오르막길을 한참 올랐는데 숨이 차고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고 잠시 바위에 앉았다. 가끔 뛰어다니던 아기 고라니가 보이지 않았고, 호랑나비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간 게 아닐까. 소란하던 숲이 어찌 이리도 조용한 걸까. 나만 다른 세상으로 옮겨 와 있는 듯했다. 다른 날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등산객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삼복더위 아닌가. 


목표로 정한 곳은 산 정상이다. 참나무가 우거진 그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산바람을 쐬리라. 휴일이면 거기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달달하고 시원한 레몬 맛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바람맞으며 먹고 싶었다. 다람쥐가 나무 뒤에서 엿보고 그 맑은 눈을 굴리다가 달아나는 장면도 상상되었다. 아이스크림 먹으며 땀 식히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천천히 콧노래 부르며 산에서 내려올 계획이었다.


그 계획은 등산로로 접어들면서 산산이 깨졌다. 산행을 그만두고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내가 갖고 있는 장점이자 단점 중의 하나가 한 번 정하면 도중에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결정하는데 긴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한 번 결정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편이다. 그런데 산행 초입부터 도중하차하고 싶은 생각이 들다니. 다리에 모래자루를 찬 것처럼 무거워 걸음을 뗄 수 없었고, 온몸엔 땀이 흘러 금세 옷이 젖어버렸으며, 숨이 차고 힘들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걸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한다는 옛 시구 때문은 아니다. 한 번 정한 것은 끝까지 하는 게 내 오랜 습성이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권도(權道)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게 지혜일 수 있는데. 알면서도 나는 아직 용납되지 않는다. 이게 만용이지 뭔가. 그것 역시 안다. 불과 보름 전에도 거뜬히 올랐던 정상인데 갑자기 이렇게 힘들다니, 아무리 삼복더위라 해도 난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 그 생각은 착각일까.


한 걸음 떼고 몇 걸음 걷다가 쉬었다. 물을 마시고 또 걸었다. 걸을 때마다 배에서 물이 출렁거렸다. 간신히 정상에 오르긴 했다. 평소에 45분 걸리는데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정상에 아이스크림 파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실망. 등산객 서너 명만 눈에 띄었다. 모두 남자다. 물병에 물이 거의 없어 병아리 오줌만큼 남은 걸 알뜰히 따라 마셨다. 다람쥐가 없었고, 바람도 없었다. 산 정상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종일 뭐 하셨어요? 더웠죠? 에어컨 켜고 계시잖고요.” 퇴근한 아들이 말했다. “산에 다녀왔어.” 내 말에 아들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금세 “어후우.” 하며 한숨을 내쉰다. 내 성격을 아는지라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나 죽을 뻔했어. 엄청 힘들더라. 늙었나 봐. 몇 번이나 쉬어서 정상까지 갔어.” 아들은 연이어 “어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한다는 말이 무리하지 말라는 거였다. 


이제 선선한 바람이 불 때까지 산행은 보류다. 둘레길이나 개천가를 살살 걸어야겠다. 착각하거나 만용 부리지 말고 자연스럽게 내 몸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리라. 잠깐! 사실은 그보다 삼복더위 때문이 아닐까. 맞다! 더위가 문제지, 아직 내 몸이 문제는 아니다. 불과 보름 전하고 이렇게 다르다는 게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아무리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게 나이 든 사람의 몸이라 해도. 그래도 당분간 산에 오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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