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보류

핑계

by 최명숙


글쎄, 만용이었을까. 만용이 아니라면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더위 탓일 거라고. 산에 오르면서 고민했다. 처음 느낀 몸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산에 오르는 것도 힘든데 고민까지 하자니 더 힘들고 땀이 줄줄 흘렀다. 이런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무력감이 들면서 약간 어지럼증도 느꼈다. 급기야 내 몸에 대한 실망감까지 들어 망연자실할 정도였다.


산행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집을 나선 건 오전 1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왜 갑자기 등산할 생각이 들었을까. 날은 덥고 하고 있는 일은 진도가 안 나갔다. 그럴 때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게 좋고 그 방법은 산행이었다. 오래된 내 습관이기도 해서 무작정 산으로 향한 터였다. 바깥 온도는 집안 온도보다 훨씬 높아 숨이 막힐 정도였다. 따끈따끈한 햇살이 온몸에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숲 속은 괜찮을 것 같았는데 덥긴 마찬가지였다. 바람 한 점 없어 더욱 그랬다. 오르막길을 한참 올랐는데 숨이 차고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고 잠시 바위에 앉았다. 가끔 뛰어다니던 아기 고라니가 보이지 않았고, 호랑나비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간 게 아닐까. 소란하던 숲이 어찌 이리도 조용한 걸까. 나만 다른 세상으로 옮겨 와 있는 듯했다. 다른 날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등산객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삼복더위 아닌가.


목표로 정한 곳은 산 정상이다. 참나무가 우거진 그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산바람을 쐬리라. 휴일이면 거기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달달하고 시원한 레몬 맛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바람맞으며 먹고 싶었다. 다람쥐가 나무 뒤에서 엿보고 그 맑은 눈을 굴리다가 달아나는 장면도 상상되었다. 아이스크림 먹으며 땀 식히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천천히 콧노래 부르며 산에서 내려올 계획이었다.


그 계획은 등산로로 접어들면서 산산이 깨졌다. 산행을 그만두고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내가 갖고 있는 장점이자 단점 중의 하나가 한 번 정하면 도중에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결정하는데 긴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한 번 결정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편이다. 그런데 산행 초입부터 도중하차하고 싶은 생각이 들다니. 다리에 모래자루를 찬 것처럼 무거워 걸음을 뗄 수 없었고, 온몸엔 땀이 흘러 금세 옷이 젖어버렸으며, 숨이 차고 힘들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걸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한다는 옛 시구 때문은 아니다. 한 번 정한 것은 끝까지 하는 게 내 오랜 습성이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권도(權道)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게 지혜일 수 있는데. 알면서도 나는 아직 용납되지 않는다. 이게 만용이지 뭔가. 그것 역시 안다. 불과 보름 전에도 거뜬히 올랐던 정상인데 갑자기 이렇게 힘들다니, 아무리 삼복더위라 해도 난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 그 생각은 착각일까.


한 걸음 떼고 몇 걸음 걷다가 쉬었다. 물을 마시고 또 걸었다. 걸을 때마다 배에서 물이 출렁거렸다. 간신히 정상에 오르긴 했다. 평소에 45분 걸리는데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정상에 아이스크림 파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실망. 등산객 서너 명만 눈에 띄었다. 모두 남자다. 물병에 물이 거의 없어 병아리 오줌만큼 남은 걸 알뜰히 따라 마셨다. 다람쥐가 없었고, 바람도 없었다. 산 정상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종일 뭐 하셨어요? 더웠죠? 에어컨 켜고 계시잖고요.” 퇴근한 아들이 말했다. “산에 다녀왔어.” 내 말에 아들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금세 “어후우.” 하며 한숨을 내쉰다. 내 성격을 아는지라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나 죽을 뻔했어. 엄청 힘들더라. 늙었나 봐. 몇 번이나 쉬어서 정상까지 갔어.” 아들은 연이어 “어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한다는 말이 무리하지 말라는 거였다.


이제 선선한 바람이 불 때까지 산행은 보류다. 둘레길이나 개천가를 살살 걸어야겠다. 착각하거나 만용 부리지 말고 자연스럽게 내 몸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리라. 잠깐! 사실은 그보다 삼복더위 때문이 아닐까. 맞다! 더위가 문제지, 아직 내 몸이 문제는 아니다. 불과 보름 전하고 이렇게 다르다는 게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아무리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게 나이 든 사람의 몸이라 해도. 그래도 당분간 산에 오르지 않기로 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진부하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