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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24. 2024

복수초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이었다. 입춘이 지났을 뿐이지 봄이라기엔 추위가 여전하던 날, 눈이 채 녹지 않은 남한산성에 올랐다. 그때 난 삶의 여정 속에서 가장 힘든 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참으려 해도 흐르는 눈물은 찬바람에 선득거렸다. 그래도 꾹, 꾹, 누르며 산에 올랐다. 북문에서 서문 쪽으로 가는 산성 바깥쪽을 택했다. 차가운 산바람을 더 많이 맞는 길이었다. 희끗 희끗 남은 눈이 응달에 웅크리고 있듯, 내 마음도 한없이 웅크린 날이었다. 


성벽을 따라 오르는 양지쪽엔 햇살이 제법 따뜻하게 내리쬐었다. 한 시간 정도 걷고 나서 따뜻한 성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간식을 먹었다. 산에 오를 때 간식을 거의 챙기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아침을 걸렀기 때문에 허한 속을 달래야 했다. 마음이 허할 때 속까지 비면 더 슬프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누구에게 기댈 게 아니라 나를 스스로 위로해야 한다는 것도. 더 슬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속을 채워야 했다. 


사과 반쪽과 두유를 하나 마시고 다시 일어섰다. 등산객들이 제법 심심찮게 올라왔다. 오르막길을 올랐다. 마음이 힘들면 숨차서 헐떡거릴 정도로 걷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숨차게 오르던 길이 끝나고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왔다. 북문을 지나 서문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쯤이었다. 길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자락에 노란 등불 같은 게 여기 저기 피어 있는 걸 보았다. 수십 개의 등불을 켜 놓은 듯했다. 


얼른 내려가 보았다. 아, 복수초였다. 삶의 여정에서 힘든 등성이를 오르고 있다는 걸 순간에 잊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내 앞길을 밝히는 등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그랬다. 암담하던 앞이 훤해지면서 길이 보이는 듯했다. 꽃은 희끗하게 남은 눈과 차가운 땅을 헤치고 활짝 피어 이른 봄바람을 맞고 있었다. 엎드려 꽃잎에 얼굴을 댔다. 보드라움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의욕 같은 걸 느꼈다. 


한동안 복수초 옆에 앉아 있었다. 저 꽃도 온 힘을 다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는데, 암담하다고 해서 포기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내게 있는 거라곤 끈기 하나인데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내겐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애의 꽃 한 번 제대로 피워보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다시 용기가 생겼다. 그래, 이 남한산성 10.9km를 걸어보리라. 


캄캄한 밤에 어머니가 들고 서 있던 등불과 복수초가 겹쳐 보였다. 중학교 때 버스 통학을 했다. 학교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칠흑 같은 밤일 때가 있었다. 달이 없는 날, 어머니가 종종 등불을 들고 정류장에 서 계셨다. 추수 마치고 한유한 이맘때 겨울 문턱이었던 것 같다. 어두워지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내릴 정류장을 어림짐작으로 가늠해 내리면, 뜻하지 않게 나와 계신 어머니 손에 들린 등. 그 등불 따라 깜깜한 길을 어머니와 함께 걸어 집으로 갔다. 


어두워도 두렵지 않았고 빈약하지 않았다, 불빛 덕분에. 가슴 충만해지는 느낌, 그건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그날 보았던 복수초는 어머니 손에 들린 등불처럼 노랗게 타고 있었다. 어떤 역경도 견디라고, 암담한 현실도 이겨내라고 격려하는 듯했다.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에 더 힘을 주고 걸었다. 그렇게, 그날은 성곽을 한 바퀴 돌았다. 복수초가 준 용기 덕분이었다. 


봄이 온 것을 알리는 꽃은 많다. 산수유와 생강꽃, 개나리와 진달래, 봄맞이꽃, 봄까치꽃 등. 모두 봄꽃들인데, 나는 봄을 떠올리면 언제나 복수초가 먼저 생각난다. 내가 힘들 때 용기를 주던 꽃이어서 그럴까. 희끗거리는 눈과 찬 땅을 비집고 노란 등불을 켠 듯 피는 꽃이라 그럴까. 어머니가 깜깜한 밤 정류장에 들고 계시던 등불 같은 꽃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내게 어두운  길을 밝혀주었던 것은 등불이었고 또 복수초였다. 둘은 서로 아주 닮았다. 


그때 힘든 삶의 등성이를 난 복수초 덕분에 넘었다. 꽃은 그 향기와 고운 자태로 마음을 기쁘게 하지만 용기를 주기도 한다. 내가 꽃이든 어떤 사물이든 의미 부여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보니 그런지 모르겠으나, 복수초 또한 잊을 수 없이 소중한 꽃이다. 꽃과 관련된 이 연재 글을 쓰면서, ‘꽃 속에서 놀던 때’라는 표제보다 ‘꽃이 건네는 위로’가 더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 복수초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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