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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18. 2024

국화

  

이맘때쯤이면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국화꽃 져버린 ♬ 겨울 뜨락에♪로 시작되는 ‘고향의 노래’다. 마지막 부분에서 새된 소리가 날 때 있지만 노래 요청을 받으면 주저 없이 부르기도 하는 애창곡이다. 특히 이즈음에 부르면 제법 정취가 나기도 하는 그런 노래다. 물론 가사로 보면 겨울쯤에 불러야 제격인데, 서두의 ‘국화꽃’ 때문에 가을 노래로 먼저 떠오르는 듯하다. 


국화는 내가 좋아하는 꽃이다. 좋아하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마는 유난히 좋아한다. 얼마 전 내 생일에 제자 둘이 국화를 선물했다. 한 무더기 가득 노랗게 피어나는 큰 화분 하나. 또 주황색과 자주색이 핀 소국이 심긴 작은 화분 두 개. 모두 세 개 화분에서 핀 국화가 한 달 이상 우리 집을 환하게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꽃을 보는 게 내 일과가 되었다. 국화꽃 속에 숨은 이야기가 나는 왜 그리도 많은 걸까 생각하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십 년 후, 삼촌까지 세상을 뜨자, 우리는 황매화 울타리가 아름답던 집에서 떠나 이사했다. 어른들이 도저히 그 집에선 살 수 없다는 거였다.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두 아들을 잃은 집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나는 이사하기 싫었다. 무엇보다 황매화 울타리와 앵두나무 때문이었다. 삼촌이 지은 행랑채와 신식 화장실을 두고 어떻게 간단 말이냐고 할머니와 어머니께 말해도 소용없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신작로 길가에 있는 정류장이 딸린 집이었다. 가족의 사별로 인한 슬픈 시간을 견디기엔 아마도 시끌벅적 사람들이 드나드는 집이 나을 거라고 마을사람들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때는 마을 전체가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던 시절이었으므로, 이장의 권유로 먼저 살던 사람과 집을 맞바꾸게 되었던 듯하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뽀얗게 먼지가 일었다가 앉는 마루엔 언제나 흙먼지가 있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수시로 마루를 닦았다. 


불만스러웠다. 황매화가 그리도 예쁘게 피고 골담초와 앵두나무가 있는 전에 살던 집이 그리웠다. 어쩌다 마루를 닦으며 나는 툴툴거렸다. 버스를 타기 위해,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사람들이 수시로 할머니가 계시는 안방에 드나들고, 그럴 때마다 흙먼지를 떨어뜨리고 나갔다. 산골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지만 걸레를 들고 살다시피 하는 할머니와 엄마를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오곤 했다. 


이사했던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었다. 뒤란 울타리 밑 꽃밭에 국화꽃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꽃이 활짝 피었다. 흰색, 자주색, 노란색이다. 소국과 약간 꽃송이가 큰 것까지 골고루. 아침 찬 기운이 도는 이른 가을부터 입동을 지나 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겨울 초입까지 뒤란에선 국화향기가 그윽하게 풍겼다. 그제야 이사한 게 불만스러워 불퉁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몇 송이 꺾어다 내 방 책상 위에 꽂아놓기도 했다. 


나라고 해서 이성에게 동경을 받지 않았겠는가. 나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꽤 있었다. 착각이라고 웃을 사람도 있을 테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난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그 근거 또한 있다. 남편은 평소에 자기가 결혼해주지 않았다면 충청도 산골에서 고추밭 매고 있을 거라고 놀렸는데, 그 사건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사건, 그래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한 남자가 날 찾아온 일이다. 그것도 국화를 한 아름 안고. 내가 좋아하는 꽃이 국화인 것을 아는 남자가, 그것도 내 생일날에 찾아왔으니 사건은 사건이지 않는가.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마침 생일을 맞아 이른 저녁을 단둘이서 먹으러 나가던 참이었다. 졸지에 우리 셋이 나의 생일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이상하게도 싱글싱글 웃었고, 남자는 조용히 밥만 먹었다. 


그가 내민 국화 다발은 꽃병에 꽂혀 한동안 우리 집을 그윽하게 만들었고, 남편은 그의 존재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존재라고 해봤자 별 것도 아니다. 그저 어릴 적 친구일 뿐이다. 단, 내가 꽃병에 물을 갈아줄 때면 싱그레 웃으며, 첫사랑 애인이 준 거니까 그렇게 정성스럽게 관리하는 거냐고 놀렸다. 첫사랑 애인은 물론 아니었고, 내가 그 남자를 특별하게 생각한 적도 없지만 나 역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살짝 웃기만 했다. 그날 이후 그 남자는 내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연락조차 없다. 


엊그제 아들과 밤 산책 중에 어느 가게 앞을 지나면서 국화 화분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옛날 생각이 났다. 이맘때 국화가 가득하던 길갓집 뒤란, 국화를 한 아름 안고 왔던 남자도. 밤안개가 산책길에 내리기 시작했다. 옛날의 모든 추억 위에 살포시. 가게에도, 가게 앞에 놓인 국화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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