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에서 생각하다

by 최명숙


오랜만에 산에 오른다. 어느새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깊었다. 수목은 봄부터 몸을 감싸주던 잎을 아낌없이 떨어뜨리고, 깊은 잠에 빠진 듯 아니 묵상하듯 서 있다. 수피에는 물기가 빠지고 윤기마저 사라진 것 같으나 자태는 오히려 당당하고 고아하다. 어쩌란 말이냐,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은데 요원하기만 하니. 지난가을에 떨어져 누운 낙엽이 발아래서 바스락 소리를 낸다. 가쁜 숨과 마치 호흡을 맞추는 듯하다.


지난가을엔 두어 번 이 산에 올랐다. 그것도 가을의 끝자락에서였다. 둔덕 입구에서 도깨비바늘을 보고 처음이다. 푸릇하던 도깨비바늘 잎사귀는 마르고 거무튀튀해졌다. 산바람은 차가웠고, 박새들 지저귀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추위를 피해 둥지에 들어간 걸까. 푸드덕 꿩 꿩 날아오르던 꿩도 보이지 않는다. 그날 이후 처음 산에 발을 들여놓았다. 여전히 산은 나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산골에서 자란 나는 열일곱 살에 객지로 나와 살면서도 언제나 마을 뒷산을 그리워했다. 속상한 일이 있거나 앞이 암담해질 때 먼저 떠올린 것도 산이었다. 뒷산에서 가끔씩 멀리 지나가는 버스를 보며 도회지로 나가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막상 낯설고 물선 도시에선 그 산골의 뒷산을 그리워하다니, 이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진달래 군락지, 마타리꽃 군락지, 잔대와 원추리나물이 많이 나던 곳, 생강나무가 있던 곳 등 뒷산 구석구석 나는 꿰뚫고 있었다.


마을 뒷산을 떠올리면 금세 눈앞에 훤히 그 정경들이 펼쳐지곤 했다. 한동안 그 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 줄기를 발견했고, 지긋지긋하도록 결핍만 가득하던 그 고향에 가고 싶어 명절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그리웠던 고향집에 이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건만 가지 않는다. 이 또한 무슨 일일까. 삶이 바쁘기 때문이겠으나 그리움이 옅어져서 그런 것일지 모른다.


목숨과 바꿀 것 같던 사랑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던 그리움도, 지긋지긋하던 결핍도, 물기 없고 윤기 잃은 나무껍질처럼 포슬포슬해진 것일까. 지난한 삶의 골짜기를 건너느라 감성은 메마르고 살기 위한 몸부림만 번뜩이는 것일까. 때론 그것이 두렵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흡이 있는 날까지 말랑거리는 감성으로 살고 싶었으므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 내리막 다시 오르막길 중턱에 쉼터가 있다.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쪽빛이다. 무염하다. 한동안 하늘만 보았다. 아무리 좋은 것도 물리는 때가 있는데 쪽빛 겨울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둥지에 들었던 박새가 나왔나 보다. 옆의 작은 신갈나무 가지에서 포르릉 포르릉 날아다니며 맑은 목소리를 낸다. 딱 딱 딱 딱따구리가 나무둥치 쪼는 소리도 들린다. 산에 오르느라 숨차고 힘들 때 보이거나 들리지 않던 모습과 소리들이다.


갑자기 가슴이 쫙 펴지면서 막힘없어 몸이 살찔 것만 같다. 심광체반(心廣體胖), 이 멋진 어휘가 생각난다. 여기에 해당되는 말은 아니겠으나 느낌만은 그렇다. 이것은 산이 주는 여유다. 산이 주는 너그러움이고 덕이다. 세상살이에 치이고 상처받으면서 아파할 줄만 알았는데, 그것들이 나를 익어가게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상처받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떨어져 누운 낙엽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처가 있지 않은가. 다시 가슴이 펴진다.


정상을 향해 오른다. 꼭 정상까지 가려던 계획은 아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산길을 걸으리라. 그러다 내려오고 싶을 때 미련 없이 내려오리라. 사람의 계획이라는 게 늘 어긋나기 마련일까. 모처럼 나섰으니 정상까지 오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정상’이 주는 느낌은 뿌듯하면서도 애잔하다. 인생길에서 내리막을 향하고 있는 나로선 당연하게 드는 느낌이리라. 애잔함, 그것은 나를 사랑하고 싶게 만든다. 내 삶을 사랑하게.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하지만 나와 맞는 말은 아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인(仁)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매사에 격정적이고 분노가 많았던 내가 아니던가. 어질기보다 쓸데없이 진지하고 따지기 좋아하며 경우에 맞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내가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 내가 산을 좋아하다니. 인자요산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릴 때 씁쓸하게 미소 짓는 건, 그래서다. 찔림, 그렇다, 찔려서다.


정상에서 몇 분간 스트레칭을 하고 쪽빛 하늘을 쳐다본다. 몇 명 등산객은 간식을 먹는다. 그들은 귤껍질을 까서 과육을 입에 넣는다. 아무 준비도 없이 나선 나는 갑자기 새콤달콤한 귤을 간절하게 먹고 싶어진다. 신갈나무에 매달린 마른 잎 몇 개가 팔랑팔랑 흔들린다. 오리나무 마른 열매도. 무성한 나뭇잎을 달고 보낸 지난여름을 나무들도 생각할까.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저 나무들처럼 은성했던 젊은 날을 나도 떠올려 볼까. 힘들고 고단했던 날들이 미화되는 건 추억 때문이리라.


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은 짧고 쉬웠다. 정신을 차리고 내려왔다, 힘이 빠져 후들거리지 않도록.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도 그래야 하리라. 겨울 산에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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