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기가 10층에서 멈추었다.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탔다. 두어 번 본 적 있는 아이였다. “안녕?” 인사를 건네자 아이는 고개를 비틀어 엄마를 쳐다보았고, 대신 아이엄마가 인사했다. 두 모녀는 조용한 성격인 듯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아이의 얼굴이 갸름하면서도 고전적으로 예뻤다. “전에 우리 본 적 있죠? 머리가 참 기네. 이름이 뭐예요?” 아이는 살며시 웃는 듯한 표정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윤서라고 했다.
여자아이를 보면 나는 자꾸 말을 걸고 싶다. 아들만 둘인 딸에게 손녀 하나 더 낳으면 어떠냐고 했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손자가 둘이나 있는데 손녀까지 바란다면 욕심이지 싶다가도 여아를 볼 때마다 아쉽다. 그렇다고 아들이 결혼해 손녀를 낳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아들인데 벌써 손녀를 바란다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아닌가.
나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두 분에게 유난스러우리만큼 사랑을 받았다. 친할머니에겐 첫 손주였기 때문일지 모르겠으나, 얼마나 손에서 놓지 않았으면 나를 방바닥에 내려놓을라치면 발을 오므리고 디디지 않으려고 했을까. 할머니와 고모가 서로 내 손녀야, 내 조카야 하며 품에서 놓지 않으려 했나는 말도 하셨다. 나는 기억에 없는 일인데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하며 흐흐 웃었다. 그 까마득한 옛날이 생각나서였으리라.
중학교 졸업 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할머니는 내게 ‘가장대우’를 해주었다. 할머니가 밥을 하면 제일 먼저 내 밥을 퍼주었다. 실질적 가장인 엄마 밥보다, 남동생 밥보다, 내 밥을. 객지에서 마음 시린 생활을 하고 있는 손녀가 안쓰러워 그랬을 것 같지만 그보다 내게 한 ‘가장대우’였다고 믿는다. 할머니는 참으로 공의로운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떠나 다시 도시로 가면서 할머니의 그 마음을 떠올렸고, 열심히 일해서 집에 돈을 더 많이 보내줘야지 다짐도 했다.
내가 결혼할 적엔 아버지 자리에 할머니가 앉았다. 누가 생각해 냈는지 참으로 합당한 처사였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면 작은아버지나 큰아버지 심지어 외삼촌이 앉았다. 서삼촌이지만 삼촌들이 여럿 있었고, 외삼촌도 둘이나 있는데 할머니가 엄마와 나란히 앉았다. 그때 사진을 볼 때마다 누구 생각이었는지 기발하고 파격적이며 합당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할 만큼 나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방학 때마다 나는 외가에 가곤 했다. 외할머니의 모습과 목소리가 아직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하다. 외가에 가던 날엔 밤새 엄마와 외할머니가 이야기를 두런거렸고 그 이야기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이 들었다. 때로 두 분의 울먹이는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있었지만 나는 잠든 척했다. 나 역시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게 모르나 마음이 울적해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다음날 엄마는 나를 외가에 놓고 막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긴 방학 동안 외가에서 외사촌들과 같이 어울리며 지냈다. 방학숙제를 하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놀았는데, 가끔 동갑내기 외사촌오빠가 내게 심술을 부렸다. 오빠에게는 친할머니지만 내게는 외할머니였으니 할머니의 사랑을 저울질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오빠는 온전한 사랑을 받고 싶어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골방에 처박혀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을 읽고 손 가지 않게 지내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혼자된 딸이 안쓰럽고 일찍 세상 떠난 사위가 생각나지 않았을까. 그 마음이 나에게 향했고 오빠는 감각적으로 그걸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랑받고 산 날들이 내 몸속 어느 곳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훗날의 내 삶을 이끌었던 듯하다. 어릴 적에 할머니들로 인해 인정의 욕구가 꼭꼭 채워졌기 때문에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힘들거나 암담할 때도 내 앞의 삶을 최선 다해 살지 않았을까. 지금은 이만큼 어른이 되었다고 보여드리고 싶지만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하늘에서나마 나를 지켜보시리라.
친할머니가 주신 사랑에 나는 보답하지 못했다. 겨우 한 것이라곤 용돈 몇 푼 드린 것과 병중에 계실 때 뵈러 갔더니 속옷을 내놓아, 그걸 몇 번 세탁해 드린 것밖에 없다. 엄마는 며느리보다 손녀가 더 편했던 모양이라며 그렇게 내놓으라고 해도 안 내놓으시더라고 했다. 할머니 마음이 내게 얼마나 가까웠는지 그걸로 알 수 있었다.
외할머니께는 돌아가시기 전 서너 달 동안 병간호를 해드렸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중학교를 막 졸업하고 취직하기 전이었는데, 여러 가지 여건과 상황으로 볼 때 내가 적격이었는지 엄마와 외삼촌의 권유로 할머니 간병을 맡았다. 할머니가 드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물론 옆에 자면서 대소변 수발까지 다 맡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오로지 할머니가 내게 주신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리라는 마음으로 했던 것 같다.
1층에서 내린 윤서는 엄마 손을 잡고 폴짝폴짝 투스텝으로 걷는다. 아이의 긴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귀엽다. 뒷모습을 보며 나도 뒤따라 걸었다. 윤서가 한 번 돌아다보았다. 내가 웃어주자 살며시 웃는다. 나도 손녀가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이 무슨 끝없는 욕심인가 싶어 실소했다. 딸은 안 되겠고 아들이나 구워삶아(?) 장가보내 손녀를 얻는다면 가능하겠는데,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니라서.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