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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03. 2022

앞치마

지금이 중요하다

     

우리 집엔 앞치마가 없다. 어쩌다 보니 그 흔한 것 하나 사놓지 못했다. 웬만한 집에선 두어 개씩 예사로 있는 게 앞치마인데. 내가 얼마나 엉터리 주부인가 말이다. 당당하게 주부라고 말하기도 낯 뜨겁다. 하지만 살림을 남의 손에 맡겨본 적 없으니 주부는 주부다. 지금까지 내 손으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들 키우고, 살림했다. 그런데도 앞치마는 없다. 


결혼하기 전에 그려보던 장면이 있었다. 하얀 식탁보를 씌운 식탁, 거기 놓인 장미꽃 꽃병과 맛깔스러운 반찬, 맛있는 냄새와 함께 끓고 있는 찌개, 프릴이 달린 하얀 앞치마를 입은 나. 기다리는 가족들이 들어오고,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밥을 먹는 그 모습. 너무 진부한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장면을 그렸으니까. 


중학교 가정 시간에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앞치마였다. 흰색 바탕에 프랑스 자수를 아랫부분에 수놓은. 레지 데이지 스티치, 새틴 스티치, 아우트라인 스티치 등을 외우며 수틀에 끼워 수를 놓았다. 그때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했던 것 같다. 가정, 결혼 등의 단어를. 설렜다. 몇몇은 키득거리기도 했다. 하얀 바탕 앞치마에 곱게 수놓듯, 내 인생도 그렇게 만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막연히 결혼 후 가정의 모습을 그려봤을지도. 그때의 사춘기 소녀 적 감성이 남아 그런 식탁을 꿈꾸었을 것 같다. 


식탁에 가족이 모여 밥 먹는 건 우리의 일상이었다. 그려보던 것처럼 하얀 식탁보가 씌워진 식탁은 아니었고, 장미꽃 꽂힌 꽃병을 올려놓지도 않았지만. 모두 식성이 좋아 반찬 타박하지 않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한 적도 있다. 잠시였다. 식구들은 모두 바빴고, 나 역시 일하랴, 공부하랴, 정신이 없었다. 편히 앉아 느긋하게 식사한 적이 드물 정도로. 


그때는 몰랐다.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고, 과일 먹고, 이야기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다는 걸. 그리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앞치마 두르고 꿈꾸던 식탁을 차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만큼 시간이 많다고, 기회가 충분하다고, 서두를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빨리 컸고, 자기들의 일과 결혼으로 집을 떠났다. 이제 먹는 것도, 사는 방식도, 드나드는 사람도, 단출하다. 굳이 앞치마를 입고 식탁 차릴 일이 없다. 


결혼 전부터 그려보던 장면을 한 번도 연출하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앞치마만 있어도 대충 흉내는 내봤을 텐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산을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 쉬운 걸 왜 못했을까. 그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나는 그렇게 이상적인 주부 노릇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난 진정한 의미에서 주부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 전업주부인 적이 없기 때문이지만 내 마음의 문제였던 것 같다. 내가 계획했던 것들을 이루기 위해 달리느라 여력이 없었다. 물론 그것이 무의미하다거나 후회한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때는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으니까. 아쉽다는 거다. 내가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어떤 이는 속으로 웃을지 모른다. ‘앞치마’ 그게 뭐라고, 그렇게 못 해본 게 뭐 그리 회한이 남느냐 할지 모른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어이없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생각은 다양하고 느끼는 것도 다 다르니까. 


내가 앞치마 하나 없이 지금껏 살았다는 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걸리는 것이, 식구들에게 제대로 된 밥상을 준비해주지 못했다는 것. 그 식성 좋은 아이들과 남편에게 밥 고슬고슬하게 지어, 맛난 반찬과 찌개로, 정성껏 밥상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헐레벌떡 급하게, 빨리빨리, 무성의하게 밥상을 차린 아내였고 어미였다. 그게 가장 아쉽다. 


지금은 하고 싶어도 못한다. 기회가 없다. 모두 각자 생활하는 방식이 다르고, 함께 살지도 않으며, 영원히 부재중인 식구도 있다. 지금이라도 앞치마 하나 사는 게 뭐 어려울까마는, 이제 있으나 없으나 의미가 없다. 내가 그렸던 장면을 연출할 수 없으니. 


왜 모든 걸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언제든’이 문제다. 그래서 놓친 게 의외로 많다. ‘지금’이 중요하다. 뭐든 지금 해야 한다. 미루면 아쉬움이 남을 수 있으니까. 앞치마 입고 정성껏 식탁 차리는 아내 모습 어미 모습 못 보여준 게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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