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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Oct 29. 2023

건망증일까 기억상실일까

    

이상했다, 약봉지가. 똑같은 약인데 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찍혀 있는지. 약이 다르다면 모를까. 고개를 갸웃했다. 감기약은 아침 점심 저녁에 먹는 약이 다를 수 있다. 졸린 성분은 대개 저녁 약에 들어 있기 마련이니까. 손목 아픈데 먹는 약은 그렇지 않았다. 딱 두 알. 소염진통제와 소화제다. 식후 30분에 한 봉지씩 먹게 되어 있다. 그 똑같은 약봉지에 왜 그렇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찍힌 것일까. 그 이유를 아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약을 먹기 시작한 후 며칠 되지 않아서다.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헷갈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30분 후 따질 것 없이 식후에 바로 먹어버렸다. 이제 괜찮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여전히,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3일 치 약인데 3일이 지나도 한두 봉지 남고, 3일이 안 되었는데 약이 없는 경우가 생겼다. 이거야 원!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이제 약을 먹은 후 혼잣말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약을 먹었고.’ 뭐 이런 식으로.


그렇다고 헷갈리지 않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약이 남거나 모자라는 일이 생겼다. 할 수 없이 약 세 봉지를 식탁 한쪽에 꺼내놓고 식후에 바로 먹었다. 그러고 나서부터 괜찮았다.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인정하기로 했다. 두 가지 측면에서다. 내가 워낙 바쁘니까 하며 스스로 위무하는 것 하나, 우리 나이에 흔한 일인데 뭐 하며 일반화하는 것 하나다. 모두 다 살자고 하는 짓이다. 사는 날까지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살 일이다. 


그 후, 약봉지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표기되어 있는 이유를 알았다. 얼마나 친절한가. 얼마나 엽렵한가. 또 얼마나 인문학적인가. 환하게 웃던 그 약국 약사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다른 약국도 다 그러하리라. 내가 다니는 약국만 그럴 리 없다.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한 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어느 때는 아주 불편한 세상 같았는데. 


오늘 아침에 약 봉투에서 약을 꺼냈다. 아침 점심 저녁이 각각 찍힌 세 봉지의 약을. 그중 아침 분을 먹었다. 딱 두 알. 세 알도 네 알도 아닌 두 알. 약을 먹으며 오늘 글감은 이것으로 하자고 생각했다. 약을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물론 식후 30분이 아니었다. 식후 1분쯤이다. 아예 잊고 안 먹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그냥 먹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데, 어떻게 식후 30분을 지킨단 말인가. 그것까지 지켜서 먹을 자신이 없다. 뭐든 하나에 집중하면 몇 시간이 가도 모르는 이상한 습관을 가진 나이므로. 


식탁 한쪽에 약 두 봉지가 남았다. 점심, 저녁이 찍혀 있는. 남아 있는 두 봉지 약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언제 이렇게 됐나 싶어서.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수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나의 인생도 저쯤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 물든 것일까. 에잇! 다 상관없다. 놓여 있는 약봉지처럼 덩그런 내 인생이라 해도.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명확하지 않은 기억이라 해도. 다 괜찮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부터 그랬다. 건망증, 그래 건망증이라고 해두자. 그게 심했다. 그렇게 아끼던 지우산을 학교에 두고 집에 와 오리가 넘는 그 길을 되짚어 다녀온 적 있고, 싸준 도시락을 챙겨가지 못해 점심을 쫄쫄 굶은 적도 있으며, 숙제한 것을 집에 놓고 와 발을 동동 구른 적이 있잖은가. 답답할 정도로 정직한 내 성품을 아는 선생님이 숙제한 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종아리를 맞았으리라. 


그때는 건망증이고 지금은 기억상실인가. 약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헷갈리는 건 아무래도 건망증과 다른 성질 같다. 그래도 두어라! 말아라, 그냥 건망증이라고 하자. 우기는 것으로야 나를 따라올 사람 없다. 그런대로 근거를 대면서 우기니까, 아주 생떼는 아니게 보일 테고. 생떼를 쓴다 해도 뭐랄 사람 없으니, 나 편할 대로 생각하리라. 지금 이것도 건망증이라고, 어릴 적부터 습관이라고. 


오늘 아침에 식후 바로 약을 먹었다. 먹어도 낫지 않는 손목이 야속하긴 해도, 누구 말대로 여왕처럼 아끼며 다독였다. 약 먹고 물리치료도 하니 이제 나아야지? 말을 걸었다. 이제 하다 하다 손목에게까지 말을 거는 사람이 되었다. 산책하면서 물오리, 갈대, 달맞이꽃, 나무 등에게도 말 거는 나니까, 내 손목에게 그러는 거야 이상할 게 무엔가. 어떤 행동 뒤에 발화되어 나오게 한다. 그래야 잊어버리지 않으니까. 드라이기 쓰고 난 후 코드 뽑으면서도 말한다. 코드 뽑았고,라고. 


이제서 약봉지에 끼니가 표기된 이유를 알다니, 늦되는 나다. 아니, 그만큼 약 먹는 걸 싫어한 나다. 그래도 어쩌랴, 조금씩 약 먹기에 익숙해져가고 있으니. 건망증과 기억상실 사이를 오가며. 여전히 건망증이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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