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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09. 2022

나는 좀팽이다

서운한 일인걸 어쩌랴 

      

나는 좀팽이다. 왜 이다지 속이 좁아터진지 모르겠다. 안 그래야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마음을 몇 번이나 먹어도 그게 잘 안 된다. 누구 말마따나 ‘쿨’하게 살아야지 하다가도 자꾸 서운한 마음이 솟아오른다, 샘물처럼 퐁퐁. 그러다 보면 다시 또 섭섭해진다. 이런 좀팽이가 어디 있냐 말이다. 이젠 ‘종심소욕 불유구’가 되어야 할 나이가 가까워오는데, 이 무슨 덜된 모습이냐 말이다. 사람이 아직도 덜 된 걸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으나 서운한 건 또 서운한 것이니 어쩌란 말인가. 


한 벗이 있었다. 그 친구가 부탁하는 웬만한 건 다 들어줬다. 내 시간, 돈, 마음 상관없이. 언제든 부르면 달려갔고, 밥을 샀고, 차를 샀다. 푸념하면 들어주고 다독여주었다. 절대 충고하거나 잘난 척하지 않고 조용히 그 친구 편을 들어주었다. 새벽에 교통사고가 났다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왜 당신 남편에게 하지 않고 내게 하느냐는 말 하지 않고, 가서 처리해주었다. 그뿐인가. 놀란 가슴 진정시켜 밥 사주고 병원에 데리고 가느라, 내 일에 차질을 빚을 지경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그렇게 했다. 


엊그제 그 친구에게 처음으로 작은 부탁을 했다가 거절당했다. 나에게는 긴급한 일이었다. 그 친구가 능히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일이었고, 돈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고민조차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머리가 띵했다. 힘든 일이고 돈이 드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 친구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거절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누워서 떡 먹기’ 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 친구도 그걸 안단다. 그런데 싫단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 말이다. 아, 누워서 떡 먹기가 어려운가! 아무튼 거절당했다. 


나와 그 친구의 관계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고, 신뢰가 없었나 싶고, 지금까지 관계는 무엇인가 싶고, 허탈하기 그지없다. 수없이 부탁을 들어줬고 편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작은 부탁을 거절당하고 말았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쉬운 일인데 하기 싫단다. 본인이 하기 싫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싶긴 하다. 그런데 자꾸 섭섭하다. 가끔은 괘씸해지기도 한다. 이 무슨 좀팽이 같은 마음인가 말이다. 


아니할 말로, 베풀었다면 그것으로 끝나야지, 무슨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나도 다른 이들에게 받은 게 많은데 그걸 생각하고 잊어야지 싶다가도, 속에서 불끈거리는 것을 느낀다. 사람이란 존재는 다 그런가, 나도 그런 적은 없나, 성찰을 해보다가도 속이 상한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가 스스로 한 행동이었는데, 이제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이렇게 속이 부글거리는 건 유치한 거다. 틀림없이 유치하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려야지 싶다가도 갑자기 속이 뒤집힌다. 이 무슨 좀팽이 같은 마음인가 말이다. 


그래, 그냥 난 좀팽이라고 생각하자.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나와 결부되지 않았을 때는 대인처럼 굴어도, 내 일과 결부되면 좀팽이가 되는 게 보통이지, 그러니 성인군자가 되기 힘든 거지, 나라고 별 수 있나, 스스로 위로한다. 그걸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수양’이라는 거잖아. 난 수양이 덜 된 거야, 앞으로 살아갈 날도 남았으니 더 성실히 수양하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스스로 위무한다.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세상이 어지러운 거 아닌가, 난 그냥 보통 사람일 뿐이야, 스스로 판단한다. 이 무슨 좀팽이 같은 짓인가 말이다. 

이 글을 쓰는데 딸아이가 전화를 했다. 


“엄마, 온이 봐주러 오실래요? 저 아범과 저녁 모임에 나가볼까 싶어서요.” 

“그래? 알았어! 갈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그냥 대뜸 승낙한다. 아기 볼 생각에. 생각만 해도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온이, 흔히 말하듯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랑 놀면서 이 부글거리는 마음을 달래 볼까. 


옛말에 “외손자를 귀애하느니 방앗공이를 귀애하라”는 말이 있다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다. 아무튼 지금 좀팽이 같은 내 마음을 외손자 온이가 달래주리라 기대하면서, 마음이 바빠진다. 너무 급해서 글이 제대로 됐는지 어쨌는지도 모른 채, 마무리한다. 마음은 벌써 외손자에게로 달려간다. 역시 나는 좀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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