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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14. 2022

오늘 하루만 지나면

격리 해제 

 

오늘 하루만 지나면 격리 해제다. 이제 역학조사나 정확한 관리가 어려운 실정에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자가 격리를 위반한 것이 발각되면 벌금을 낼 수 있다는 몇 번의 문자만 왔을 뿐, 전화를 걸어 격리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가면 안 된다. 그것이 규칙이니까. 


지인이 문자로 시간 되면 만나자고 연락했다. 

“격리 중이에요.”

“그거 상관없어요. 이제 조사 안 해요. 나오세요.”

“아이참, 격리 중인데 어떻게 나가요.”

“허참, 상관없다니까요. 모두 나다녀요.”

“안 돼요. 규칙이고 법이잖아요.”

“참나, 답답하시네요. 규칙과 법은 초월하라고 있는 겁니다. 하하.”

숫제 장난이다. 물론 마음은 안다. 내가 너무 답답할 테니 그걸 풀어주자는 의도리라. 그 지인도 얼마 전에 겪은 일이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안 지킨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지켜야 돼요.”

“물론 지키면 좋죠. 하지만 이 경우는 달라요. 안 지키는 사람이 부지기수예요.”

한참 말씨름을 했다. 기운이 빠지고 같은 말 되풀이하기도 싫었다. 그럴 수 없다고 의사를 확실히 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지금은, 격리 중이어도 진료와 약을 사기 위한 최소한의 외출은 가능하다. 그 외의 것은 안 된다. 오로지 모든 것을 시민들의 양심과 의식에 맡기고 있는 상태이므로, 더 잘 지켜야 한다. 규칙이나 법은 지키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시민의식이기도 하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상관없이 지켜야 한다. 그런데 수단을 동원한 통제가 심하지 않으면, 위반하는 게 융통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자라면서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고지식하다는 말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게 고지식한 것은 아닌데. 내가 겪은 사람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이 그런 부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타고 난 사람인지, 교육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초등학교 때 통지표마다 준법성 부분은 늘 ‘가’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선생님이 수기로 적은 내용에 자주 들어있는 어휘도 “준법정신이 강하고”라고 쓰여 있다. 어린아이가 얼마나 규칙을 잘 지키면 그렇게 쓰여 있을까 싶다. 


그동안 나는 결혼식에 가거나 여럿이 모이게 될 경우, 자발적으로 코로나 검사를 한 후 참석했다. 여행을 하게 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감기 증세만 있어도 꼭 검사를 했다. 대면 강의를 하게 되면서부터 더 조심하고 관리하며 지내온 3년이었다. 내가 걸리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했다.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내가 격리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몇 사람이 말했다. 그렇게 철저하고 건강한 사람도 걸리는 거냐고. 웃을 수밖에. 그동안 내가 해온 일련의 행위에 대한 놀림과 안타까움이 함께 들어 있는 말이었다. 물론 안타까움이 더 크리라.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옹졸해지는 것 같다. 전화를 끊고 나면 묘하게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일주일 동안 격리 기간이 이제 하루 남았으니까. 몸이 크게 고통스럽지 않으나 약 기운 때문에 잠이 쏟아졌다. 그런데 자고 깨면 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가끔 창밖에 짙어져 가는 단풍과 갈색으로 변해가는 앞산을 보며, 방 안에서 제자리 걷기를 했다. 짧고 바빴던 하루가 이제 길고 지루하다. 


자식들과 제자들이 보내준 배달 음식을 끼니마다 먹었다. 배달 음식을 좀처럼 주문하지 않아 몰랐는데, 다양한 음식들이 많았다. 식사 준비를 하지 않고도 일주일을 먹고살다니 고마운 일이다. 한 것도 없이 받기만 해서 민망하다. 음식과 필요한 용품, 갖가지 차까지, 넘치게 받아먹고 있다. 맛을 전혀 모른 채. 


사람은 참으로 다양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격리 중이라 심심할 테니, 자기 작품을 봐달라고 메일로 보냈다. 어디 투고할 글이라면서.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처럼, 심심하지 않게 해 준다나 뭐라나. 몸이 아픈 사람에게 할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급해도 낫고 나면 부탁할 일이지. 부탁하면 늘 들어주었더니 당연히 생각한다. 메일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다고. 심심한 것이 아니라 아프다고. 


이번에 아프면서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금 알게 되었다. 간단한 문자와 전화에도 마음이 들어 있다. 나 또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 한 자락 나눠주리라 생각했다. 어려울 때, 옆에 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리는 시간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좋을 때는 다 좋지만 어려울 때는 진정 나를 생각하는 사람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만 가면 내일부터 나는 격리 해제된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후유증 없이 말끔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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