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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17. 2022

명함, 사용할까 말까

변화라면 변화 

  

첫 명함을 갖게 되었다. 직접 만든 게 아니다. 내가 속한 연구소에서 만들어주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건넨 적 없다. 연구소장 임기 2년. 그 기간 내에 다 소모할 수 있을까. 딱히 쓸 일이 없는 듯하다. 이름, 직책, 이메일, 전화번호, 대표적인 프로필 두어 개 적은, 아주 간단한 명함이다. 내 취향이나 의도에 맞춰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 기관에 속한 사람들의 명함은 색깔과 디자인이 똑같다. 프로필만 다를 뿐이다.


내가 받은 명함이 50여 장 가까이 된다. 학교에만 있었다면 받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바깥일을 조금씩 하다 보니 받은 명함이다. 받았을 뿐이지 따로 연락할 일은 없었다. 만났을 때 소개하며 건네는 것이니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게 명함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는 메모지에 전화번호와 이름만 적어 주었다.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모두 의례적인 인사였다. 


받은 명함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언젠가 없애는 날이 올 텐데, 그것이 나는 힘들다. 가볍게 인사하면서 건네는 거니까 의미를 두지 말자고 생각해도 쉽게 버릴 수 없다. 몇십 년 전의 명함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니, 심하게 말하면 나는 좀 병적이다. 버리지 못하는 병. 아니, 너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병인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누구에게 선뜻 명함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나처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가볍게 취급되는 것도 싫기 때문에. 쓰레기통이나 잡동사니가 섞여 있는 어느 구석에 내 이름과 프로필이 적힌 명함이 버려져 있다면. 안 보이는데 뭐.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났더라도 모를 일까지 걱정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나다. 쓸데없이 진지하게. 


그러고 보니 요즘 세상에는 명함이 꼭 필요한 것 같지 않다. 전화번호만 교환해도 카톡에 있는 사진을 보면 대략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정서가 어떤지, 가족사항까지 알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공개된 세상이 돼버린 것 같다. 


예전에는 화장지나 종이가 귀했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쓰는 뒤지를, 지난 달력이나 신문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썼다. 어머니는 달력이나 신문지에 사람 얼굴이 있으면 꼭 가위로 오려내고 뒤지를 만들었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얼굴이 찍힌 종이를 화장실에서 어떻게 쓰겠느냐며. 그리고 남의 이름을 변형해서 부르거나 별명으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이름은 그 사람이나 다름없다면서. 내가 명함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맥락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름 짓기에도 관심이 많다. 아이들 이름을 모두 내가 지었고, 친척과 지인들의 아기가 태어나면 부탁받아 지어주기도 했다. 외손자들의 이름도 음은 딸과 사위가 골랐지만 한자 이름은 내가 지어주었다. 이름 짓기가 쉽지 않다. 호적에 올릴 수 있는 있는 한자가 정해져 있다. 뜻만 좋다고 아무것이나 지을 수 없다. 부르기 좋고 의미도 좋으며 모든 조화가 잘 맞는 이름을 골라야 한다. 나는 그런 고심이 싫지 않다. 그래서 이름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지어준다. 


내가 남의 명함을 쉽게 취급하지 않는 것은, 이러저러한 나의 정서 때문인 것 같다. 남에게 그러하듯 나도 함부로 취급받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현대인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명함을 못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슬슬 명함을 사용해야 할 텐데. 임기 내에 쓰지 못하면 그냥 버려야 하니. 아니면 직책을 지우고 써야 한다. 


가만히 명함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럴듯하게 보인다. 개성이 없어 보였는데, 다시 보니 나를 잘 표현하는 것도 같다. 직책과 프로필과 이름 등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보인다. 재밌는 일이다. 이제 너무 큰 의미 두지 말아야겠다. 새로 만나는 사람과 인사 나눌 때, 정확한 이름이라도 소개한다는 마음으로 사용하면 될 것 같다. 그것을 간직하고 버리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가볍게 생각하면 될 일이다. 


명함 때문에 이래저래 생각만 늘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세상살이인데. 그래도 괜찮다. 생각하는 건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니까. 건강한 마음과 몸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이렇게 생각하니 명함이 생긴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그러니 재밌다. 오늘부터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명함을 건네며 인사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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