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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19. 2022

소도 때려잡겠다

김장 


오랜만에 김장에 동참했다. 그동안 동생이 해준 것을 갖다 먹었다. 민망하고 고마운 감정이 뒤섞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에는 주말농장에 심은 배추가 많아 김장 분량이 많단다. 그러니 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흔쾌히 그러기로 했다. 앉아서 받아먹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


떠나기 전에 말했다.

“언니가 가서 할 일, 많이 남겨 놔.”

그동안 못 도와준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동생은 알았다며 좋아했다.     


도착하니 배추를 벌써 절여놓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안쓰러웠다. 내 몸의 반밖에 안 되는 여리여리한 동생은 시간 내서 온 나를 오히려 안타까워했다. 이게 동기간의 정이리라. 동생은 바쁜데 와서 도와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하다고 했다. 


“우리 최 씨네 자매가 한다면, 못할 게 있겠어? 소도 때려잡을 걸.”

“에고 언니! 그 말씀도 맞네요.”

동생이 너스레를 떨었다. 


집안일보다 내가 맡은 일을 우선시했던 나는 많은 부분에서 놓친 게 많다. 경조사는 꼭 챙겼지만 친척이나 동기간과 만나 지내거나 노는 것에 인색했다. 만나게 돼도 얼른 일어나곤 했으니까. 그래도 누구 하나 불만하지 않았고 나는 그걸 당연시 했다. 그러다 보니 모여서 김장도 거의 못 했다. 돈 몇 푼 건네고 그냥 갖다 먹는 뻔뻔한 언니고 딸이었다.


갖은 양념을 씻고 무채를 썰었다. 조금밖에 안 했는데, 벌써 팔이 아프고 손목이 시큰거렸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웃기잖아.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편하게 하면서도 손목이 시고 팔이 아프니 말이야. 이러니 뭘 해먹고 살겠니? 옛날에 김장하던 장면과 겹쳐지니 하도 한심해 웃음이 나지 뭐야.”

그제야 동생도 맞는다며 맞장구쳤다. 


그때는 입는 것도 시원찮아 김장할 때, 몹시 추웠다. 온 동네 사람들이 김장을 하기 때문에, 동네에 있는 우물을 쓰지 않았고,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개울물에서 배추를 씻었다. 남자어른들이 지게에 절인 배추를 져서 날라주었고, 다 씻으면 또 집으로 갖다 주었다. 남자어른이 없는 우리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물기를 빼서 광주리나 이남박에 담아, 머리에 이어 날랐다. 김장도 한해 농사라고 많이 했다. 


나는 무청김치를 잘 먹었다. 한겨울 통가리에서 꺼낸 고구마를 삶아 무청김치를 척척 올려 동치미와 함께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흡족했다.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올 때까지도 무청김치는 밥상에 오르거나 된장찌개 속에 넣어 끓여 먹었다. 너무 시큼해지면 어머니는 물에 헹구어 들기름 넣고 볶아주기도 했다. 


그 무청김치를 동생이 미리 해놓았다. 어찌나 반갑던지. 주는 대로 냉큼 챙겼다. 동생도 고구마에 얹어 먹으면 맛있다고 했다. 우리는 한 집에서 공유한 추억들이 많아 할 이야기도 많았다. 겨우 요만큼 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예전에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었겠느냐며 이제야 그 노고를 알게 된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마침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호랑이도 아니고, 엄마는 왜 이렇게 마침 전화를 하셨어요?”

동생이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니들 내 말하는구나. 힘들지? 나도 가고 싶은데, 몸이 시원찮으니 마음만 있다.”

“엄마 오시면 우리 더 힘들어요. 가만 계시는 게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렇지, 내가 갈 수도 없거니와 가봐야 너희들 힘만 들게 하지.”

“맞아요, 엄마! 우리가 알아서 잘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엄마, 예전에 무청김치 참 시원하고 맛있었는데, 동생이 해놓았네요. 둘이 옛날이야기 했어요.”

어머니는 예전에야 양념이나 뭐 제대로 들어가게 했느냐며,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라 그랬을 거라고 하셨다. 그래도 그리운 날들이다. 


새벽에 배추를 씻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하얗고 귀여운 하현달이 어둑한 새벽하늘에 걸려 있었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지만 부지런히 배추를 씻고 속을 버무렸다.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언니, 안 하던 일도 참 잘하네요. 뭐든 열심히 성실하게 하니, 꿈을 이룬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 할 줄 모르니 성실하게라도 해야지. 후훗. 너는 살림 백단이잖아.”

서로 격려하면서 하다 보니 금세 김장을 다했다.


“우리 정말 소도 때려잡겠다. 그치?”

“하하하.”

동생의 웃음소리가 집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모처럼 즐겁게 김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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