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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24. 2022

요즘 아기들

육아가 힘든 이유 

     

요즘 아기들은 참 특별하다. 세월이 흐르면 많은 기억들이 미화되는 것일까. 분명히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 키웠다. 내가 잊은 것일까. 연년생인데도 싸우는 모습을 못 보았다. 둘 다 순했다. 남들도 이런 애들이라면 열도 키우겠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잊는 게 아니라, 우리 애들은 확실히 수월하게 키운 게 틀림없다.


요즘 아기들을 보면 무척 다르다. 내가 볼 때 종이 다른 것 같다. 똑똑해졌다고 해야 하나, 예민하다고 해야 하나. 예전에 우리 애들 키울 때와 무척 다르다. 그래서 어느 땐, 이 아기들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때는 몸만 아기지, 어른이 속에 들어있는 것 같다.


어려도 말만 할 줄 알면 의사표현을 정확하게 한다. 아니, 말도 하기 전부터 몸으로 싫고 좋음을 강하게 표현한다. 어쩌면 그럴까. 뱃속에서부터 배워가지고 나오는 것 같다. 앞으로의 세상살이에서 알고 배워야 할 것이 많아, 기본적인 것을 습득하고 태어나나 보다. 그런 것 보면 약간 무섭기도 하다. 무슨 아기들이 이렇게 야무질까 싶어서. 이런 아기들이 커서 어른이 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요즘 아기들은 새로운 정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 그래서 장난감을 오래 가지고 놀지 않는다. 장난감의 기능을 금방 습득하니 싫증도 금방 낸다. 물론 그랬다가 나중에 다시 갖고 놀기도 한다. 예전에는 장난감을 사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일일이 가르쳐주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그럴 필요 없다. 눈으로 보면 바로 안다.


터치를 자연스럽게 한다. 장난감이나 교구 또는 교재에 있는 버튼을 꼭꼭 잘 누른다. 알려주지 않아도 터치하는 것은 도사다. 몇 번의 경험에 의해 터치하면 뭔가 소리가 나든지 열리든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휴대폰 사용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터치 하나로 모두 습득할 지경이다.


가끔 손자들을 봐주러 가서 보면 혀를 내두를 때가 있다. 돌 조금 넘은 아기가 말귀를 알아듣는 걸 보면 신기하다. 소통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 다섯 살짜리 온이는 말해 무엇하랴. 말로는 내가 질 정도다. 국문학자인 할머니를 이기는 다섯 살짜리 베이비라고 딸이 웃어댄다. 그러면서 말한다. 요즘 아기들 다 그렇다고. 우리 집 아기만 그런 게 아니라고.


딸네 집에 아기를 봐주러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지친다. 둘 다 남아라서 그럴까. 어찌나 에너지가 넘치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온이는 무척 얌전했다. 그런데 둘째가 태어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지더니 지금은 전혀 다른 아기가 된 것 같다. 예전에 할머니가 그러셨다. 사람 열 번 된다고. 사람은 열 번이나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실감하고 있다. 나중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 나를 놀라게 할까.


나도 모르게 내뱉는다. 아이고, 니들 클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삼한지 모르겠다. 딸은 엄마가 다 잊어서 그럴 거란다. 그럴지도 모른다. 추억은 미화되고 희석되는 거니까. 그래도 저렇지는 않았다고 하면 그냥 웃는다. 자기 아이들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싫다 좋다 표현을 안 한다. 싫어하는 표정을 보이면 급할 때 나를 부를 수 없을까 봐 그러는지. 그래도 금쪽이 프로를 보면 우리 손자들은 별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연년생으로 위로 아들과 아래로 딸을 두었다. 그때만 해도 종이기저귀 쓰는 일이 드물어, 천기저귀 50개를 가지고 아이들을 키웠다. 요즘 빨래 건조기 쓸 때마다 장마철에 천기저귀 말리느라 고생한 기억이 떠올라 한숨이 나오곤 한다. 내 기억에는 그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단칸방에 살면서 장마철에는 기저귀를 방바닥에 널어 말렸다. 연탄불을 넣어서.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는 불편함이고 어려움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종이기저귀를 척척 꺼내 쓰는 요즘에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 일 말고는 둘 키우면서 어려웠던 기억이 없다. 둘이 싸우지 않고, 순종적으로 잘 자랐다. 더구나 위의 아들이 한 살 어린 여동생을 끔찍하게 챙겼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둘만 놓고 일을 보러 하루 종일 시골에 다녀왔던 적이 있다. 생각만 해도 무지함에 머리가 흔들린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그래도 둘이 잘 있었다는 게 기적이다. 그럴 정도로 키우기 수월했다.


요즘 손자들 봐주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면서 예쁘기만 하던 모습에서 다른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 아기들보다 똘똘한 것은 맞는데, 순화롭지 않고 까다롭다. 갈수록 더 그런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자꾸 예전 내 아이들 키울 때와 비교하게 된다. 어쩌면 그렇게 의사표현이 정확한지, 피곤할 정도다. 어릴 적부터 뭐든 아기에게 물어보고 원하는 대로 해주는 교육방법 때문인지, 종이 달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요즘 아기들 교육하기 더 힘들다는 것이다. 아이들 중심의 교육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뭔지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교육방법이 딸과 나는 좀 다른 것 같다. 요즘 자녀들이 그런다지 않는가. 아이들 교육은 자기들이 할 테니, 엄마 아버지는 예뻐만 해달라고. 할머니 할아버지 할 일이 예뻐만 하는 거라면 나는 사절이다. 물론 딸과 사위는 내가 손자들에게 하는 것에 아직 토를 달지는 않는다.


손자들과 헤어져 집으로 오면서 다짐한다. 다음에는 더 많이 예뻐해 줘야겠다고. 내가 선생 노릇을 오래 해서 그럴까. 손자들의 언행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 그래서 자꾸 교정해주려고 한다. 헤어져 올 때마다 그게 걸린다. 다음에는 예뻐만 해주고, 교육은 딸과 사위에게 맡겨야지 싶다. 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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