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개미 라이프
94. 2천5백만 원짜리 점심 식사와 비트코인
2024년 4월 16일 화요일 흐림
캘리포니아 토지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공기 또한 따뜻했으나, 컨테이너 사무실의 공기는 데워지기 전이었다. 컴퓨터를 켜고 냉기를 버티며 어제의 일기를 쓰고 브런치를 먹기 위해 나폴리로 향했다.
어제처럼 운전하고 가는 시간조차 성공의 마인드를 배우는 시간이어야 했기에, 유튜브 썸네일을 대충 클릭했다. ‘책 읽는 개그맨’으로 성공한 고명환이 출연한 영상이었다. 국숫집을 열어 30억 원의 현금을 만들고, 이제 300억 원을 끌어당기며 달리는 이유에 대해 ‘가치가 있는 일을 해야 돈이 따라오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도서관을 지으려고 300억 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 말은, 무작정 ‘돈’의 크기가 아닌 ‘필요한 돈’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마이클 또한 토지 보상금을 종잣돈 삼아 100억 원을 만들고, 그 투자 경험과 따라오는 명성을 교두보 삼아 1천억 원을 만들기로 했다. 상장기업을 인수해 기업가치를 높이며, 믿고 투자한 투자자들에게 배당을 주고, 이들과 힘을 합해 MBC 방송국을 인수해 공정한 뉴스와 건전한 드라마를 제작하고, 나아가 [위풍당당]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고 성공으로 가는 하루를 살아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 스마트폰 알람 기능을 5시 50분으로 설정했다. 몸살감기 이후 눈 뜨는 대로 일어난 게으름을 떨쳐내고, 일기와 영화 시나리오를 쓰며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주식 투자도 점검했다. -20%를 기록하는 계좌 중 하락률이 높은 코인베이스 2배 레버리지인 CONL 주식을 더 매수하기로 했다. 69달러에 216주를 매수했으나 51달러로 떨어졌기에 216주를 더 매수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비트코인이 10% 하락할 때마다(CONL 주식은 20% 하락) 계속 매수하되, 주식을 50%씩 더 늘려 매수하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지난 SOXL 투자에서 얻은 교훈을 이번에 적용해 볼 기회일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하려면 투자금은 1억 원이 조금 넘게 필요했다. 다행히 다른 종목에 물타기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없었다.
‘그래, 이번에는 오직 CONL 주식만 매수해서 다섯 배 먹어보자!’
그렇게 다짐하고 매수 주문하고, 토지 보상금을 받으면 매수하기로 한 TMF 주식도 1천만 원어치 162주 매수했다. 하락의 고통을 즐기며 기준점으로 삼아두기 위함이었다. 또한, 변동하는 주가에 대응하기 위해 평일 저녁 시간은 주가를 지켜보기로 하고 여흥은 주말로 한정했다.
크레타 아파트 단지 [ㅇㅇ 부동산] 중개사의 전화도 있었다. 전세 기간 만료를 앞두고 “매도할 생각은 여전하신지요?”라고 물었다. “네. 그런데 임차인이 주위 재건축 아파트 소유자인지라 연장 계약할 모양입니다”라고 말하자 “지금까지 연락 없으면 재계약하는 의사로 봐야 하겠네요.”라고 되물었다. 이에 “그러게요. 실거주자는 비어있는 집을 좋아할 테니 매매하려면 비워둬야 하는데 그건 어렵겠네요”라고 대답해서 더는 진행되지 않았다.
나머지 시간은 영화 시나리오 작성을 염두에 두고 영화 [타짜]를 시청했다. 정 작가가 방문하자 회식을 위해 [맛나리 양갈비] 식당으로 향했다. 꼭 가야 할 이유는 없었으나, 싸우기라도 한 사람처럼 발길을 뚝 끊은 탓에, 인사성 방문이기도 했다. 가게를 인수한 부부가 “이사한 줄 알았어요”라고 격하게 반겼다. 첫 손님이었다. 양갈비 2인분과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2024년 4월 17일 수요일 맑음
브런치는 어제 끓여 놓은 김치찌개와 밥이었다.
사발에 밥 한 덩어리를 담고 찌개를 부어 컴퓨터 책상으로 가져와 먹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이하고 서글픈 장면이었기에 남겨 둘 욕심으로 DJI 오즈모 포켓 3를 켰다가 닫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궁상스러운 까닭이었다. 오리온 자산그룹 ㅇㅇㅇ의 전화를 받은 때도 이때였다.
짧은 안부 인사 끝에 “투자한 물건이 공매로 낙찰되어 어제 배분받아 연락드립니다. 잘해보려고 했으나 요즘 부동산 낙찰자가 낮아서 원금의 절반이 손실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고 운을 뗐다. 듣고 있던 마이클이 수저질하면서 “그렇지. 요즘은 다 그래! 그런데?”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래서 마이클 님이 투자한 5천만 원도 그렇게 되어 이렇게 사정을 알리는 전화를 드립니다. 마이클 님뿐만 아니라 가족, 지인들도 모두 손실이 나서 전화를 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서요”라고 말했다. 이에 마이클이 대답했다.
“5천? 1억은 돌려받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ㅇㅇㅇ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5천만 원에 대해 잊고 있었으므로 투자금 손실과 자신과의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2년 전 크레타 아파트 전세 보증금을 받은 얼마 후 돈을 빌려준 사실을 기억해냈다.
금요일마다 강남 오리온 사무실로 가서 점심 식사 모임을 할 때였다. 한창 ‘성공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뽕에 차서 이리저리 휩쓸리던 그때, ㅇㅇ이 “돈 나갈 때 없잖아? 그러니 애들 빌려줘!”라고 말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때, 마이클의 대답은 “나는 사채 안 해!”였다. 다만, P2P 업체를 창업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또 자신의 가오를 위해 1호 대출 상품으로 크레타 아파트까지 담보대출 상품으로 만들어주고, 필요 없는 1억 원을 빌린 후 이자까지 줘 가면서 도와주었었다. 그러니 차용증이나 투자 약정서 따위도 작성하지 않고 송금해 주었는데 지금, ‘후순위 담보대출에 투자했다’라며 손실 났다고 ‘절만 반 돌려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돈을 투자한다고 받아 간 거야? 사무실에서 채무자에게 나갈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빌려준 건데? 그렇게 처리한다고?”
마이클이 기가 막혀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네!”였다. 그리고 알려 준 계좌번호로 2,600만 원이 입금되었다.
타인에 의해 변화를 맞는 것은 고통스럽다. 투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 잘못으로 손실 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내가 주관하지 않은 손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벤츠 SLK 로드스터 지붕을 열고 두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가평 [ㅇㅇ 유원지] 낙찰자의 전화를 받을 때도 이때였다.
주행 풍으로 통화가 어려웠기에 도로 가장자리에 주차 후 진지하게 ‘(소유권이 있는)무허가 건물 가격 흥정’에 들어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낙찰자가 ‘법정 지상권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마이클이 “인적인 감정이나, 그쪽을 일부러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잘 알아보고 하셔야 합니다”라며 알아듣도록 말해도 ‘소송하면 됩니다’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낙찰자가 “(무허가 건물 가격을) 얼마 정도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가격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실익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나폴리에 한 번 내려오시죠?”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아닙니다. 전화로 해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큰돈 묶이고 상황판단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쏴아아아--”
바닷물이 느리게 모래사장을 오갔다. 하늘에는 네다섯 대의 모터 패러글라이딩이 엔진 소리를 내며 날고 있었다.
“허~ 허~”
헛웃음을 흘리며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태양에 데워진 바닷물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반성만 하고 살 것인가?’
자문하고 화를 삭이며 결심했다. 인간과 만나는 사업은 하지 않기로! 오직 미국 주식으로 승부 내기로! 그렇게 뇌는 현실을 인정했으나 가슴은 그러지 못했다. 아린 가슴에 21년 스카치 블루를 부었다. 저녁 식사로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 먹을 때였다.
안방 침대에 누웠고, 정 작가가 주식 투자를 위해 방문하는 소리에 일어났다. 거실로 나갔더니 웃으며 “결국 술 드셨네요?”라고 말했다.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가슴 아픈 날에도 술을 안 마셔야 하는가?”라고 반문하고 컴퓨터 전원을 켰다.
미국 주식은 채권 TMF만 상승할 뿐 전 종목 하락이었다. 특히 코인베이스 2배 레버리지는 어제 매수한 51달러에서 46달러까지 밀렸다가 오른 상태였기에 지정가에 산 것을 후회하기도 했는데, 1천만 원씩 매수한 SOXL, TQQQ 주식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때였다! 문득, 현재의 하락이 3년 전, 그러니까 2022년 3월 첫 미국 주식을 시작할 때와 같은 패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신이 그를 불쌍히 여겨 주식 가격을 2년 전으로 되돌려 주었다’라던가? 하는 블로거의 인사말에 영감을 얻고 미국 주식 투자를 시작했었다. TQQQ 주가가 87달러에서 50달러 대로 밀려 내려올 때였다.
‘반값이라면 승산 있지!’
3배 레버리지의 속성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유튜브로만 공부하고 49달러, 48달러에 사면 좋아하며 ‘1억 원으로 10억 원 만들자’라고 외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주가는 그 뒤로도 또 반토막이 났다. 필라델피아 반도체 3배 레버리지 SOXL을 알게 된 때도 이때였다. 과격한 변동성의 섹터 주였기에 승부를 볼 생각으로 아파트 전세 보증금까지 13억 원으로 전력투구했었다. 그리고 결과는 모두가 다 알다시피!!
왜 그랬을까? 투자에서 ‘믿음’이란 내 안에 쌓인 데이터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니 부동산 경매 투자의 경우 ‘믿음’이 있기에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으나 주식은 그렇지 못했다. 지난 2년의 기회는 그렇게 데이터를 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 경험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20%인 하락 장에서 -9,000,000원의 손실을 보이는 것 또한, 경험 덕분이다. 자본 배분 투자를 알게 된 후 예수금 2억5천만 원을 전액을 투자하지 않고 7천만 원만 투자한 탓이었다. 게다가 1배수와 3배수의 손실 및 회복의 차이, 엑셀 프로그램을 이용한 적절한 매수 가격 및 수량 산출 등은, 2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회심의 수익으로 선택한 종목은 비트코인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2배 레버리지 CONL이었다.
‘이번에는 비트코인이다!’
이미 미국 주식 투기 세력은 반도체 섹터 주로 5배 이상 큰 수익을 낸 상태이기에 ‘버릴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다음 수익 모델로 비트코인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겨우 ETF를 승인받았고, 법률 미비로 아직 연기금이 투자되기 전인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든 비트코인 가격을 떨어뜨려 저점에서 물량을 확보하려고 노력할 것이니 ‘하락은 당연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이클의 전략은 현재 가진 자본금(분노의 반토막이 된 2천5백만 원도 넣을 것이다)을 비트코인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의 2배 레버리지 CONL 주식을 사 모으는 것이었다. 이는, 예전처럼 토지 보상금을 기대하지 않은 계획표로, 이미 매수한 432주에 이어 20%(비트코인 10%) 하락할 때마다 투자금 또한 120%씩 늘려 가며 매수하는 것이었다.
계획표에 의하면 비트코인이 -70%까지 하락하면 CONL 주식은 6.85달러였고 주식 수량은 16,357주이고 투자금은 297,173,834원이었다. 이 계획표대로 하락을 버텨낸 후 5배 상승한 가격(1,485,869,170원)으로 매도하고 두 번째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다.
두 번째 작전은 TMF였다. 현재 44.57달러에 1천만 원으로 162주를 매수한 상태인데, 10% 하락할 때마다 역시 매수금액을 120%씩 늘리는 방법으로 19.19달러까지 45,244주, 10억 원을 투자하고 2배가 되는 날에 매도하는 것이다.
코인베이스의 5배 수익이 아닌 2배 수익을 정한 이유는 미국 국채금리가 드라마틱하게 낮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함에도 20억 원의 종잣돈을 만들었을 것이므로 세 번째 작전으로 이행하면 될 것이었다.
세 번째 작전은 아이디조차 K-SOXL로 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SOXL이었다. 그때 즈음에는 미국 내 경기도 악화할 것이므로 주가 또한 현재의 반토막인 21달러 근처일 것이었다. 처음 2천만 원 매수를 시작으로 주가가 15% 하락할 때마다 매수 자금을 120%씩 높여가며 80%까지 하락한 3.51달러까지 매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식은 348,138주이고 투자금은 21억5천만 원이었다. 매도는 당연히 500%에 매도할 것인데 목표 100억 원이었다.
계획에 낭보가 하나 더 얹어졌다. 딸 슬기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보상 및 착공을 절반 앞당긴다’라는 기사 링크를 보내온 것이 그것이다. 정부는 ‘2026년까지 착공에 들어간다’라고 발표했으므로 보상은 늦어도 2025년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승리하기 위해 철저하게 인간들과 거리를 두고, 마늘을 씹어먹으며 인간이 되는 날까지 버티는 웅녀처럼 나폴리 [케렌시아] 동굴에서 웅크린 채 버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