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벨로퍼 라이프
4. 건축허가서와 설계비
2016년 6월 24일 금요일, 맑음
감색 슈트를 입었다.
롤렉스 데이저스트 시계의 용두를 뽑아 돌려 날짜와 시간을 맞췄다. 자수로 ‘Firenze’라고 적힌 하얀 셔츠 끝에 커프스도 꽂고, 슈트 왼쪽 카라에 도어락 모양의 황금 배지도 달았다. 창밖에는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갈색 구두를 신고 호박마차에 올랐다. 구청 광장엔 장터가 열렸고, 청사 복도에는 김정운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이라는 강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곱슬 파마머리에 유쾌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포스터 앞을 지나 4층 건축과로 올라갔다. 한 손에는 연두색 [피렌체하우스] 건축 파일, 다른 한 손에는 마트에서 산 두유 음료가 들려 있었다.
건축과 사무실에 들어서며 눈이 마주친 여성 공무원에게 “인천 건축 담당 실무관 만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반대편에서 몸이 야윈 남자 직원이 일어나며 “약속하고 오셨어요? 출장 가셨는데요?”라고 되물었다.
“약속한 것은 아니고요. 건축 허가서만 출력해 가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요? 허가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건축 담당 공무원을 만나기 위해 전투 복장을 하고 갔으나 초식도 펼쳐 보지 못한 꼴이었다. 빳빳한 깃의 셔츠가 목살을 쓸리게 했다. 잠시 후 프린터기로 출력된 문서는 ‘건축 대수선 용도변경 허가서’로 건축주 ‘김경만’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으며, 뒷장엔 토지 지번이 나열되어 있었다.
구청을 나서며 11시에 있을 드럼 레슨은 못 할 것 같아서 부원장에게 “늦을 수도 있으니 기다리지 마세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안양 [피렌체하우스]에 도착한 시각은 11시 45분이었다. 비는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 방울씩 가늘게 떨어졌다.
카페 [블랙 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일어서며 “회장님, 이쪽으로 앉으십시오.”라며 자리를 안내했다.
“회장은 무슨, 구멍가게 합니다.”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옆자리엔 반팔 셔츠를 입은 중년 사내도 있었는데, 백화점 주차장을 올라갈 때 보니 운전은 서툴렀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말씀하신 매수 의향서를 가지고 왔습니다.”라며 서류를 내밀었다. 매수 의향서와 사업자등록증, 인감증명이었다.
좋은 서류이기는 했으나 매매 형태가 문제였다. 2억 원을 먼저 토지주인 나에게 지불하고 대출금은 인수하며, 잔금 6억 원은 6개월 후에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내가 “의향서도 대로라면, 당신들은 2억 원을 지불하고 건물 짓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4억을 지불하면 모를까요?”라고 말했다. 이에 검은 양복의 사내가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공사도 해야 하므로 3억을 받는 것으로요?”라고 제안했다. 이에 내가 “3억에 진행하려면 견질로 아파트나 담보가 제공되어야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증 다 해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내가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공증해 봐야 집행할 것 없으면 아무 필요 없습니다. 내 금고에 그런 공증 서류 많이 있습니다. 공사하다 뒤로 나자빠지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유치권 포기각서 받는다고 해도 정상으로 돌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러면 3억 하고 견질 담보가 가능한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수수료는 전에 약속한 대로 주시는 거죠?”
“아니요. 일이 오래 걸렸으니 5천 드릴 것입니다.”
검정 양복의 사내가 “그러면 회장님. 저희가 2천 더 올려서 19억 7천 받아 드릴 테니 회장님이 1천 하고, 우리 1천 더 주십시오?”라고, 돈 줄 놈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딜’을 했다.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기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가 “식사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비싼 것은 못 사드리고 간단히?”라고 제안했다.
“얻어먹으려면 제대로 얻어먹어야죠. 그런 게 어딨습니까?”
“아이고 회장님, 안 됩니다. 제가 돈이~”
사내가 어깨를 움츠리며 엄살을 부렸다. 내가 웃으며 “회덮밥이나 드시러 가시죠?”라며 일어섰고, 운전이 서툰 사내의 차를 타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맑음
영종도에서 바라보는 송도는 마치 신기루처럼 보이는 도시였던 기억이 있다. 인천 시청 앞에 있던 [예린 건축설계사무소]는 1년 사이 송도로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와 회색 린넨 넥타이, 진청색 양복바지에 연녹색 재킷을 입고 [예린 건축사무소]에 나타난 시각은 정오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옆엔 핑크색 라운드 티셔츠를 입은 준열이 동행했는데, [예린 건축사무소] 임 대표는 작년에 한 번 만났었다.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났다.
임 대표가 “이게 그동안 어렵게 설계가 진행되었습니다. 도시계획 심의를 받지 않아도 되는데 구청에서는 심의를 요구했고요. 게다가 오피스텔을 채워 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설계도 몇 차례 변경되었습니다. 그래도 선배고 해서 설계비는 5천만 원에 하기로 했었고 5백만 원 받은 상태입니다.”라며 설계비를 설명하는 것이 전액 모두 받을 생각이었다.
내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저도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것 아닙니다. 2천8백만 원에 계약해 5백을 건넨 것도 알고 있고요.”라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임 대표가 “맞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반 지력 문제로 설계 변경이 되었고 또 심의 과정, 허가가 굉장히 늦게 나왔잖아요? 그래서 그런저런 비용들이 꽤 들었습니다. 지금 도면은 옛날 도면이고 그 뒤의 도면입니다. 몇 번의 설계 변경이 들어가야 하는 것도 있기에 인정하고 그대로 진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서 건축한다고 하면 그렇게 드리겠지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건 똥 치우는 심정으로 건축해야 하기에 모두 드리기가 그렇습니다.”
임 대표도 “저도 압니다. 그 동네가 2번 종점입니다. 학교도 많이 있고요. 요즘 부평의 집 지을 땅들이 1천2백이 넘어갑니다. 당연히 땅값도 올랐고 분양성도 좋을 것입니다. 예전과는 달라졌으니 분양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입니다.”라고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 내가 “빈말이라도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아닙니다. 제가 이것 받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 번 두고 보십시오.”라고 힘주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힘이 되는 의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고통 분담 차원에서 가격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5백만 원 받았으니 4천5백인데 4천만 원 주십시오. 이번 사업비에서 설계비는 아주 작은 부분이지 않습니까?”
“압니다. 뭐 분양해서 잘 되면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작년부터 일이 진행되지 않은 것 아시지 않습니까? 제 입장은 절약하며 가는 수밖에 없거든요. 5백만 원 깎을 거면 입 부끄럽게 말도 안 합니다.”
“감리비도 9백만 원 지급된 사실도 제가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4천만 원에 계약서 쓰시죠?”
임 대표가 닦달하며 전 허가권자가 감리비 9백만 원을 지급했다는 사실, 도로 진입로 ‘토지 사용승낙서’가 지분권자들의 ‘공증’ 사용승낙서라는 내용도 말했다. 상당히 핫한 내용이었다.
내가 “네, 알겠습니다!”라고 결정하자 임 대표가 “계약서 만들어 오겠습니다.”라며 회의실을 나갔다. 그러함에도 시원한 협상이 아니었기에 마음은 불편했다.
‘양복값이라도 지불하게 해야겠다.’
새로운 시대와 삶을 열어가기 위해 맞춤 양복값으로 2백만 원 가까이 지출했다. 그러는 사이 임 대표가 계약서를 출력해왔다. 계약서를 읽어 본 내가 “계약서가 잘못되었네요. 4천만 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며 금액 부분을 짚었다. 호랑이 부조의 커다란 반지와 롤렉스 데이저스트 시계, ‘Michael’이라는 이니셜이 박힌 셔츠가 계약서 위로 덮어졌다.
임 대표가 “여기 4천만 원이라고 적었는데요?”라고 말했다. 이에 “아니, 여기는 2천8백만 원이라고 되어 있는데요?”라고 말하고, “그리고 4천만 원이라고 하셨잖아요. 5백은 이미 받았으니 3천5백만 원이라고 적으셔야죠?”라고 덧붙였다.
계약서는 과거에 만든 2천8백만 원짜리 계약서였고, 4천만 원의 금액은 이미 임 대표가 5백만 원 할인한 금액이었으나 나는 1천만 원 할인을 요구하고 있었다. 당황한 임 대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이어갔고, 결국 다시 계약서를 수정 출력하기 위해 임 대표가 회의실을 나갔다. 옆자리에 앉은 준열이 낮은 소리로 “연기하셔도 되겠어요?”라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새로운 계약서를 가져온 임 대표가 “그러면 계약 시 1천만 원, 공사 시작할 때 1천5백만 원, 준공 후 1천만 원 이렇게 하시죠?”라고 말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기에 “그렇게 하시죠.”라고 대답했다. 준열이 “도면 다시 보내주시고요. 설계도는 두 부 정도 제본 부탁드립니다.”라고 주문했다. 임 대표가 “네.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외에도 유닛 등 필요한 것 요청하시면 다 해드립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계약하느라 점심시간을 놓쳤으니 밥이나 먹읍시다.”라고 말하자 임 대표가 “기다리던 손님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되겠습니다.”라고 거절했다. “그래요. 하는 수 없죠. 계약했으니 기념사진 한 장 찍죠?”라고 말하며 닥터백에서 셀카봉을 꺼냈다. 임 대표가 “그러면 사무실 입구에서 찍죠. 거기가 좋아요.”라고 말해, 현판 앞에 나란히 섰다.
https://youtu.be/e5OJSztkBl4?si=pJzFAk4JiTNNg_m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