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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만 May 20. 2024

오늘을 삶의 마지막 날처럼

[연재] 75. 이혼 51일 차

75. 이혼 51일 차          



오늘을 삶의 마지막 날처럼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맑음     

 

  몇 해 전,

  장충동 플로렌스 빌딩에 사무실을 두던 그때였다. 아마 5년도 더 된 것 같다. 처 고모부의 아들이 ‘부동산 경매’를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투전판 같은 곳이 경매 판이기에 돈이 없는 청년에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간 후 그만두었었다. 그 청년이 결혼하는 날이다.      


  청년의 부모는 삼양동에서 오랫동안 거주해 ‘삼양동 고숙’으로 불리는데, 지금껏 전세를 살고 있다. 한 번은 집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건축한 지 오래된 주택이고 면적도 좁았다. 그곳에서 아들과 딸을 키웠다.     


  “형님 사무실에 가면 청소도 하고 그래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 기술을 배우러 보내면서 그 정도 조언은 해 줬어야 했다. 그는 지금도 청년의 불철저함을 잊지 않고 있다. 청년은 단 한 번도 사무실 청소를 한 적이 없었다. 반대로 그의 아들은, 아우가 운영하는 휴대폰 판매점에 보내면서 “네가 주인이다 생각하고 제일 먼저 출근해서 청소하고 영업준비를 하라”라고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민족이든, 가족이든 면면히 흐르는 문화가 있다. 자신이 모르고 있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DNA처럼 흐르고 있으며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학습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의 수레바퀴’라고 하듯이, 앞 세대의 전철을 밟게 된다. 다행히 우리가 물려받을 문화가 우월하거나 유능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바꾸어야 한다.      


  ‘삼양동 고숙’의 문화를 들여다보자. 낙천적이고 성실한 것은 장점이다. 그러니 입사한 회사에서 정년퇴직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칸이 없다. 아니 있긴 있는데, 수원 어디에 있는 빌라 한 채가 전부다. 그 집도 전세를 줘서 재산도 안된다. 그런 가정의 식탁 교육 또한 낙천과 성실일 것이고 다음 세대로 흘러갈 것이다. 결혼식은 어느 왕가의 결혼식처럼 화려하지만.     


  결혼식 덕분에 장모님을 제외한 처가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그는 여자와 벤츠 SLK 로드스터를 타고 갔다. 식장은 미아역 근처의 [궁전회관]이었다. 대로변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었으며 내부 인리어도 훌륭했다. 특히 신부 대기실의 인테리어는 빌딩 현관 디자인으로 써도 손색이 없었다. 다만 만들려면 돈이 좀 들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사진을 찍어오고 싶었는데 그가 가져간 카메라의 렌즈가 어제 구매한 500mm였기에 건물 귀퉁이 사진밖에 찍을 수 없었고, 행사 사진 자체 촬영도 화각이 나오지 않아 불가능했다. 고모님은 살이 쪽 빠졌기에 ‘아들 장가보낸다고 다이어트했나?’라고 생각하며 인사했는데, 여자가 “유방암 항암치료의 후유증”이라고 설명했다.      


  결혼식 주례는 일당을 받고 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주례사 또한 ‘돈 많이 벌어라’라는 식의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신랑 친구들의 축가가 불리었다. 제목은 ‘뿐이고’였다. 뷔페 음식은 전체적으로 짰다. 그는 숭어와 연어회만 몇 점 먹었다.     


 

  집으로 돌아와다. 여자가 딸을 위해 갈빗살을 구워냈다. 그가 편의점으로 가서 콜라, 소주, 맥주를 사 왔다. 식사를 마친 딸이 ‘독서실을 간다’라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쯤 후 그가 여자에게 “옷을 좀 멋지게 입어봐”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들어가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얇은 옷을 입고 나왔다. 그가 소맥 폭탄주를 몇 잔 말더니 여자를 끌어당겼다. 폭풍 같은 섹스를 시작했다.      


  자정이 다 되어 집에 온 딸이 여자를 불러 내 말했다.     


  “친구들이 자꾸 연락을 와서 전화기를 바꾸고 싶어요.”     


  희미하게 들리는 두 사람의 대화 때문은 아니지만, 목이 말라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서 들었기에 말했다.      

  “전화기를 바꾼다고 해도 친구들은 전화번호를 알게 될 것이고 연락을 할 것이다. 그러니 받기 싫은 전화는 ‘수신 거부’해라!”

  “수신 거부하면요, 내가 전화를 일부러 안 받는 줄 알아요.”

  “그래? 그러면 공부할 때는 전화기를 꺼 놓는 것이 더 나을 거 같구나. 전화기를 끄면 꺼져 있다고 나오니 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린다면 잠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거다. 그러니 네가 중심을 잡고 전화기를 통제해야지. 아빠도 전화기 통제가 자신이 없어서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거다.”     


  그렇게 딸의 전화번호 변경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자기 방 또한 너무 정신없이 너저분했다. 그래서 군입대로 비어있는 오빠 방에서 공부하다 그에게 들켰다.      



  여자는 ‘골프 생활체육지도자 3급 시험을 치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라며 준비를 마치고 시험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다. 시험은 실기와 구술, 필기로 진행된다. 여자가 “은근히 이게 걱정이 되네.”라고 말하자, 골프를 좋아하지 않는 그가 흘려듣고 “시험이란 게 그런 건데, 살아가는데 적당한 긴장은 좋은 거야.”라는 식으로 대꾸만 했다.      


  초저녁 섹스 후 잠을 잔 상태였기에 잠은 달아나 버렸다. 그가 생활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 2011. 사계절]을 집어 들었다. 이 책에서 ‘아우라’라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뜻을 알게 되었지만, 저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책을 읽다가 ‘페르소나와 맨얼굴’‘개처럼 살지 않는 방법’ 편을 읽으며 ‘현재’에 충실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그가 여자로부터 느끼는 저간의 감정은 어제의 감정이고, 사망한 아우에 대한 것도 어제의 집착이라는 것을!      


  또 ‘호텔을 건축한다’ 라거나 ‘자카르타로 여행을 떠나는 것’ 등은 내일의 일이라는 것.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면 ‘정작 오늘을 잃어버린다’라는 내용에서는 깊은 빡침이 올라왔다. 그가 ‘오늘을 삶의 마지막 날처럼’이라는 모토로 살아오는데, 사실은 덜 깨달았다는 뜻이었다.      


  오늘을 삶의 마지막 날처럼 살려면 어제의 집착과 분노는 잊어야 하는 것이고 내일의 일도 잊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 책에서는 ‘아이의 마음이’라고 했다. 맨얼굴, 본질, 아이의 마음. 물론 그가 다른 이들과 달리 맨얼굴에 가장 가깝게 살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깨달음의 즐거움으로 새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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