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비극, 하마르티아
우리는 매일매일 실수를 하면서, 어떤 실수가 일상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나간 것에는 다행으로 여기거나 크게 감사해하지 않는다. 때론 당연하게 여기거나 '휴, 운이 좋았네'라고 쉽게 넘어가곤 한다. 그런데 아주 가끔, 어떤 실수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두기라도 하는 듯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때는, 그 실수를 곱씹으며 스스로 원망하고 원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수’를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다. 자신이 당연히 가야 하는 정해진 길로부터 이탈하다, 길을 잃고 헤매다. 과녁을 빗나간 상태. 비극적 결함, 비극을 불러오는 성격적 결함.
이 '실수'는 무지해서 저지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순전히 윤리적인 과실도 아니다. 둘을 합쳐 놓은 것에 가깝다. 상대를 해치려고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아니나, 일의 결과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잘못.
한 남자가 인적이 없는 도로를 걷다가 문득 '여기서 창을 던진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어디까지 날아갈까' 시험해 보고 싶은 유혹이 든다. 이 유혹을 참지 못하고 창을 던졌는데, 하필 그때 길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사람을 맞히고 만다. 이런 과실이 바로 하마르티아다.
하마르티아는 재난(atychia)도 범죄(adikema)도 아니다. 그가 훈련장 안에서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뛰어들어 그가 던진 창에 찔려 죽고 마는 경우에는 창을 던진 남자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 뜻밖의 재난(atychia·아티키아)에 해당한다. 이는 예측하거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남자가 누군가를 죽이려는 의도로 창을 던졌다면 이는 분명한 범죄(adikema·아디케마)에 해당한다.
남자는 어느 정도 위험을 예상하고서도 마음의 유혹에 넘어가 창을 던지고 말았으므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결백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만일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도 창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저 비극을 불러오는 '실수'를 저지른 것일 뿐이다.
하마르티아라는 말은 조금 낯설지만, 이런 경우는 사실 빈번하다.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랬겠냐...', '하필 그때... 이런 일이 생기냐" 하는 등의 뒤늦은 외침의 경우가 그러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도 매일. 차를 몰다가 한눈을 판다거나, 깜빡하고 약을 잘못 먹기도 한다. 친구나 애인, 가족에게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하며 속이기도 한다. 그런데 무심코 저지른 그 실수 하나가 삶을 뒤바꿔놓을 큰 비극을 초래한다.
창을 던지고 말았는데 사람을 죽이고 만 경우, 악의는 없었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가 비극을 불러일으킨 경우, 뒤늦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라고 눈물을 쏟으며 후회해도 소용없다.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비극 앞에서는 인디언의 속담처럼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된다(If it's meant to be, it will be)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런데 한 끗 차이로, Que Sera, Sera라는 말도 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므로(Whatever will be, will be) 걱정하지 말고 지금 당장 최선을 다해 현실을 살아가보자는 긍정의 주문이다.
우리는 비극 작품을 읽으며,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지 않게 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 동정심을 가지게 된다. 작은 실수를 저질러 파국으로 달려가는 주인공을 통해 주인공에 대한 ‘연민’과 그런 일이 언제든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도 느낀다. 이를 통해 다른 이의 실수에 조금은 연민을 가지고 용서해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자신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니 반복하던 실수를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될 대로 대라 하며 나의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다가도, 작은 실수로 인해 내게 주어진 길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 인생...이려나? 비극 문학 작품도, 책도 좀 읽다 보면 조금이라도 더 현명하게 대처하게 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