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철을 지옥철이라고 불러도 될까
전면재택이었던 기존의 회사 정책이 바뀌면서 주 3일 출근을 꼭 하게 됐다. 7일에 3일은 왕복 1시간씩, 악명 높은 9호선을 타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도 9호선을 타고 오다가, 9호선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손은 물론 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고 때로는 고개도 움직일 수 없는 9호선 지하철에서는 의외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할 수 있다. 무려 5가지나 된다.
1. 생각
생각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와 진짜 지옥철이네... 가만. 지옥철? 22년 10월 29일 이후 아직도 이태원을 못 가고 있는데, 지금도 159명의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는데, 지옥철이라는 말을 써도 되려나?
라는 생각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마음껏 생각을 할 수 있다. 몸은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사람들 사이로 파묻히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명상을 하듯 내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집중할 수 있다. 평소라면 생각에 잠기다가도 번뜩 휴대폰을 켜 어딘가에 중독됐을 텐데,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라 생각만 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9호선은 여전히 지옥이다. 사람들은 밀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치를 보며 힘으로 몸으로 사람을 눌러 구긴다. 무자비하게 몸부터 들이미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밉진 않다. 자리는 없고, 출근은 늦으면 안 되겠고 하니 어쩔 수 없으리라.
한 번은 나보다 키가 작은 여자분이 털이 달린 패딩 모자와 패딩 모자 사이에 파묻혀 있었는데, 과연 숨은 잘 쉬고 계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니, 전동 휠체어를 탄 할머니, 덩치 큰 캐리어를 끈 외국인, 유아차를 접고 아기를 앞쪽으로 안고 있던 아기 아빠는 꽉 들어찬 9호선 입구에서 차마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멈춰야 했다. 세 사례 모두 직접 본 사례다. 그들이 타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9호선 차량에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몸을 욱여넣으려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도 평화... 로운 9호선.
2. 가방 공중에 띄우기 스킬
옆사람과 얼마나 꽉 끼어있으면, 한 번은 옆으로 메고 있던 에코백 가방끈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는데 가방이 공중에 떠 있었다. 책에 맥북까지 든 무거운 가방이었는데... 이런 건 좀... 좋은 건가?
3. 사라진 선반 응시하며 지하철 짐 두는 곳 없앤 기획자 원망하기
어떤 느자구없는 놈이 해외 사례, 신형 지하철 등등을 언급하며 느자구 없이 선반을 없앴을까? 극대노할 수 있다. 2호선, 9호선 몇몇 지하철에는 선반이 없다. 도저히 이해가 안 돼 기사를 찾아보니, 2017년 2018년에 한참 논란이 된 모양이다. 지하철에 짐을 두는 선반이 없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객실 개방감을 확보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취지,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해 지하철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목적 (출처: '선반' 사라진 2호선 새 지하철, "없애면 안 되는데…")
화재 등 재난이 발생할 시 시민 대피를 쉽게 하겠다는 취지 (출처: 선반 사라지는 지하철…"무거운 백팩은 어디에 두나요")
그러면서 지하철 내 화면에서는 "가방을 뒤로 멘 사람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캠페인 영상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짐 두는 곳이나 마련하고 그런 광고를 틀던가... 라고 생각할 때쯤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주로 여행 가는 길에 타게 되는 인천공항철도에는 전 객실에 선반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설레고 기쁘고 가슴 두근거리고 한없이 관대하기만 하다.
기획자 잘못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꼭 아침 8시에 노트북 가방 메고 롱패딩에 목도리 두른 사람 100명이랑 함께 선반 없는 9호선 타 보시길 바랍니다.
4. 책 읽기
9호선에서 책을 읽는 방법은 2가지.
첫째, 교통약자석 앞에 서 있기. 교통약자석 위에는 선반이 있어 짐을 올릴 수 있고, 앉아 있는 사람들 위로 책을 읽을 수 있다. 운이 좋게 안쪽까지 들어오면 그렇게 복잡한 출퇴근 시간에도 책을 제법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자리가 비워져 있는 걸 모르고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교통약자 분께 '여기 자리 비어있어요' 하고 안내해 드릴 수 있는 기회도 있다.
둘째,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 서 있기. 그러다 운 좋게 내 바로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내리면 그 많은 인파 속에서 평화가 찾아온다. (아니면 얄짤 없이 눌려 가야 됨) 패딩도 벗고, 무거운 짐을 무릎에 올려두고, 심지어 가방을 정리하는 사치까지 부릴 수 있다.
주 3일 9호선 출퇴근을 하며 생긴 한 가지 좋은 점은 책을 더 자주 읽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아직 2월 초인데, 올해 들어 6번째 책을 읽고 있다. 가방에 험하게 집어넣고 다니다 보니 책이 조금 망가지고 끝이 찢어진다는 단점은 있지만 어쨌든 좋은 시간이다.
5. 사람들 구경하기
사람이 정말 붐벼 주머니에 있는 에어팟을 꺼낼 공간도 나지 않을 땐, 보통 눈을 감고 있다. 한참 감고 있다 지루해져 눈을 뜨면 사람들 구경을 시작한다. 너무 초밀착해서 붙어 있기 때문에, 여러 명을 구경하진 못하고 시야 안에 들어오는 2, 3명 정도만 살펴볼 수 있는데 대부분은 그 좁은 와중에도 휴대폰을 보고 있다. 가슴팍은 워낙 공간이 붐벼 휴대폰을 들지 못하니, 보통은 손을 눈높이까지 올려 눈 바로 앞에 대고 휴대폰을 보고 있다.
눈과 스마트폰 간격이 10cm도 안 되는 거리로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는 사람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사물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초점을 맞추기 힘들 텐데, 그렇게 가까이에서 뭐가 보이나? 눈이 사팔뜨기처럼 되진 않나? 뭘 보고 있나 궁금해 슬쩍 살펴보면... 대부분 쇼츠나 인스타그램 스토리다. 꽉 찬 화면에 콘텐츠를 다 읽은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휙휙 위로 넘겨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럴 때마다 하, 이게 다 뭐람. 인스타그램이고 유튜브고 다 지운다! 싶다가도 집에 오면 이런 게 소소한 행복이지 라며 보다 잠드는 나. 9호선 지하철에 어울리는 진정한 서울살이 현대인이지 싶다.
내일도 화이팅. 9호선 타는 모든 분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