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처절한 ‘선물하기’의 세계
이 글의 원문은 채널예스 CHANNEL YES 칼럼 [이소연의 소비냐 존재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생일 아침. 보글보글 끓던 엄마의 짭조름한 미역국 냄새 대신 까랑까랑한 모닝콜 소리가 어스름한 새벽 공기를 가른다. 눈을 채 뜨지도 않은 채 더듬더듬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한다. 12시 정각에 맞추어 축하 메시지를 보내온 몇몇 친구들의 이름이 보여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엄지를 몇 번 내려보지 않았는데 이내 끝나는 메시지. 에잇. 이런 게 뭐가 중요해, 이불을 박차고 나오지만 어쩐지 힘이 쭉 빠진다.
점심시간.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확인해 보세요!’ 반가운 연락들에 마음이 풀어진다. 집에 뒹굴어 다니는 핸드크림이 많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렇게 생일선물을 챙겨주는 게 고마운 거지. 택배를 받아볼 주소지를 기분 좋게 남기고 선물 후기도 미리 남긴다. 맛집 후기처럼 별점도 매길 수 있다.
며칠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탄 엘리베이터. 벌어지는 문틈 사이 어둠 속에 택배 상자가 잔뜩 쌓여있다. 한걸음에 달려가 확인해 보니 와, 이게 다 뭐야. 집 앞에 귤 박스며 롤케익 상자며 건강 챙기라는 홍삼 세트까지. 위로감과 안정감을 넘어선 어떠한 확신마저 생긴다. 그래! 내가 인생을 참 잘 살았구나. 찬 공기가 들어오는 무거운 대문을 발로 밀어 잡아두고 택배를 하나둘 집 안으로 들인다. 투박한 택배 상자와 새하얀 스티로폼은 한쪽으로 제쳐두고, 안에 고이 접혀 동봉된 쇼핑백과 선물용 포장 상자를 요리조리 접어 인증샷을 찍는다. 인증샷에 달린 좋아요와 댓글을 몇 번이고 새로고침하다 잠이 든다.
아. 누가 카카오 선물하기 기능 좀 없애줬으면 좋겠어.
한 해를 떠나보내는 송년회 자리에서 누군가 한숨과 섞어 흘려보낸 말은 탄식에 가까웠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하며 정색하는 표정으로 동의 표를 보태었다. 나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도 수많은 선물하기와 선물받기의 늪에 빠져 있던 것이 분명했다.
“선물 받은 것 안 쓰고 환불하면, 선물 준 사람에게 티 나나요?” 책상을 가득 채운 선물 상자 앞에서 찍은 인증 사진이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이, 비공개와 익명으로 글을 올리는 커뮤니티에는 ‘받은 선물 티 안 나게 환불하는 법’에 대한 질문과 노하우도 쌓이기 시작했다.
'선물하기'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선물함으로써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세계의 일부가 되고, 고립된 원자 상태에서 손쉽게 벗어난다. 적어도 한 해 한 번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믿음 아래에서 이 세상에 꼭 맞는 자리를 갖게 됐다고 느끼는 것이다. '선물하기’는 이 삭막한 도시에서 우리가 (아직은) 타인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는 희미한 연결의 흔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쓰지 않고 유일하게 나눌 수 있는 게 있다면 온전한 마음이자 순수한 사랑일진대 ‘난 작년에 선물했는데 왜 얘는 올해 선물을 안 해주지’하는 외상 거래장부 형태로 마음의 본질을 오염시키지 말지어다.
다가오는 연말. 우리는 여전히 사랑받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또 확인받기 위해, 특정한 사물을 소유하고 점유하며, 선물하고 선물 받겠지만 그것만이 삶을 확인받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의 원문은 채널예스 CHANNEL YES 칼럼 [이소연의 소비냐 존재냐]에서 볼 수 있습니다.